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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저주했다(2014년 12월, 대전 송년 마라톤) > 자유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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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엄마를 저주했다(2014년 12월, 대전 송년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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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창우 댓글 2건 조회 1,004회 작성일 20-07-12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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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벌써 가버리고 계절은 이제 겨울의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날씨가 추워지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활동이 움츠러들기 마련인데, 마라톤이라는 것도 겨울이 되면 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렇더라도 대한민국 마라토너씩이나 하면서 추위에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곤란하다.


나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겨울에 아무리 기온이 내려가더라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운동장으로 나갔는데, 이제는 새벽에 운동장으로 나가는 횟수가 줄었다. 요즘은 일주일에 겨우 세 번 정도밖에 못 나가고 있다.


오늘 대회는 전마협에서 주최하는 대전 송년마라톤이다.

마협에서는 고맙게도 해마다 연말이면 대전, 충청지역의 마라토너들을 위해 대전 갑천변에서 대회를 개최한다.

그런데 이 대회는 한겨울에 열리는 데다가 장소가 갑천변이라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오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추위에 단단히 대비하고 출전해야 한다. 강변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과 맞서서 달려야 한다.


이렇게 한겨울에, 거기다가 바람까지 사납게 휘몰아치는 날에는 각별히 출전 복장에 신경을 써야 한다.

사람마다 복장이 다르겠지만 나는 하의는 꼭 타이즈를 입고, 그것도 안심이 안 돼서 목장갑을 타이즈 안에 밀어 넣는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그 이유를 단박에 알아차리겠지만, 거시기를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한겨울에 복장을 헐렁하게 하고 달리다가 거시기가 찬바람에 견디지를 못하고 얼어버려 달리기를 포기할 뻔했던 경험이 몇 번 있기도 하다.

내가 출전했던 대회 중 가장 추웠던 대회는, 4,5년 전 출전했던 대구 금호강마라톤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금호강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거시기가 견디지를 못하고 얼어버려 중간에 주저앉아 한참을 응급조치를 하고 달려야 했는데, 지금도 금호강의 찬 바람은 여전한지 궁금하다.

그런데 이렇게 추운 날 타이즈도 안 입고 러닝 팬티만 헐렁하게 입고 달리는 사람들도 더러 보게 되는데, 과연 그들의 거시기는 안녕한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추운 날 가장 추운 지역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말하자면,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20도쯤으로 내려가고, 대낮 최고기온이 영하 10도쯤 되고, 동해바다에서 사정없이 불어오는 찬바람에 체감 온도는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강원도 휴전선 최북단 지역 바닷가를 달리는 마라톤 대회가 생기면 어떻겠느냐 하는 것이다. 대회명도 이름하여 ‘대한민국 혹한기 마라톤 대회’로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추운 마라톤 대회를 나는 꿈꾸고 있다.

년 전 겨울 어느 날 새벽,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 운동을 나서면서 YTN 뉴스를 보는데 자막으로 우리나라 당일 날씨가 표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 지역 날씨(기온)도 표시되고 있었는데, 삼지연의 아침 최저기온이 무려 영하 40도 이하였던 걸로 기억한다.


삼지연은 백두산과 가까운 지역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나중에 남북통일이 되거나 남북 관계가 좋아지면 삼지연에서 한겨울에 마라톤을 한번 해보면 좋겠다는 꿈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낮에 영하 30도쯤 되는 날씨에 삼지연에서 마라톤 판을 벌여보자는 것이다.

남북 관계가 좋아지면 삼지연 마라톤을 꼭 해보자고 전마협 장영기 회장께 건의를 하고 싶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추위에 견디는 힘은 남들보다는 좀 낫다고 할 수 있다.

내가 30여 년 전, 전방에서 군대생활할 적에 겨울에 동계 종합훈련 나갔다가 혹독한 추위에 고생한 경험이 나로 하여금 평생 추위를 이겨내게 하는 힘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아무리 춥다 해도 30년 전 그때의 추위보다는 한참 못한 것 같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28년 전인 1985년 1월이었을 것이다.

내가 속한 부대는 훈련부대라 훈련이 잦았는데, 1985년 1월에 전방 산속으로 한 달간 동계 종합훈련을 나갔다. 훈련 기간 중 산속에서 주간 공격, 주간 방어, 야간 공격, 야간 방어의 전술훈련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루는 산속에서 새벽에 텐트를 치고 잠시 가면을 취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얼마나 추웠는지 난 그때 추위에 몸서리를 쳤다.


철수 준비를 하는데 온도계를 소지하고 있던 중대본부 요원이 “지금 영하 28도”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그 시간 산속에서 바람까지 솔솔 불었기 때문에 아마 체감 온도는 영하 40도에 육박했을 것이다.

너무 추워서 텐트를 개는데 손이 꽁꽁 얼어붙어서 손가락이 펴지지를 않아서 텐트를 제대로 접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추위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 군대 온 나 자신을 저주하며, 엄마를 저주하며, 이빨을 뿌득뿌득 갈며 텐트를 접어야 했다.

내가 엄마를 저주한 이유는, 엄마가 나를 딸로 낳았으면 내가 군대 오지 않았을 것인데, 나를 아들로 낳아 군대 보내 이렇게 극한의 추위에 고생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극한 상황에 몰리다 보니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때 진짜 문제가 발생했다. 잠시 두어 시간 가면을 취하는 동안 군화가 꽁꽁 얼어서 신을 수가 없게 돼 버린 것이다.
전날 눈 쌓인 산길을 장시간 행군하는 바람에 군화가 촉촉히 젖었고, 그 상태에서 잠자는 사이에 군화가 얼어버린 것이다. 이제 철수를 하여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나는 도저히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으니 꼼짝없이 대열에서 낙오할 것이고, 그렇다면 조뺑이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라 두려움에 벌벌 떨
고 있을 즈음 내 머리 위에 기적이 강림했다.

너무 추우니까 잠시 불을 피워서 몸을 녹이다 철수하라는 대대장의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대대장이 순전히 병사들 생각해서 내린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대장 자신부터 엄청난 추위를 감당할 수 없으니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래서 나는 살아났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나무를 해와서 캠프파이어 하듯 불을 피워서 몸도 녹이고 군화도 말려서 잘 신고 다음 목적지로 아무 일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10년 감수했다는 표현이 이런 때 딱 들어맞는 것이다. 겨우 30분쯤 되는 시간 동안 나는 지옥과 천당을 오간 것이다.

앞으로 그런 추위는 내 살아생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나에게 그런 추위가 또 온다면 차라리 혀 깨물고 죽어 버릴 테다! 이러니 내가 입만 뻥끗하면 “요즘 추위는 추위도 아니다.”라고 시건방 떠는 것이다.


오늘 날씨는 생각보다 그리 춥지도 않았고 찬바람의 기세도 예상보다는 좀 약했다.

오늘 하프코스를 달림으로써 지난 11월 춘마 이후 가장 긴 거리를 달렸다. 부상도 아직까지 완전치는 않지만 거의 나아가는 중이다. 내년엔 온전한 몸으로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레이스 끝나고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떡국이 너무 맛있어서 세 그릇이나 먹었다.

언제부터인가 전마협에서 제공하는 맛있는 떡국이 대한민국 마라톤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이렇게 맛있는 떡국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최고의 떡국을 맛보려면 전마협 주최 마라톤 대회에 나가면 된다.


추운 날 ‘떡국 이벤트’는 전마협에서 잘 고안한 작품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별 영양가 없는 음식을 비용만 잔뜩 들여서 이것저것 제공하는 것보다 이렇게 뜨끈뜨끈한 떡국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 훨씬 실속이 있다는 말씀이다.

떡국은 또한 웬만한 다른 음식보다 요리하기도 비교적 단순하고 비용도 적게 들면서도 참가자들의 만족도도 높다고 할 수 있으니 다른 대회에서도 벤치마킹하면 좋을 것이다.

다음 달(내년 1월)에는 세계 4대 미항, 여수 마라톤에 나가서 여수의 낭만을 즐기려고 한다.

여수는 남쪽 지방이라 그리 춥지 않을 것으로 보여, 달리면서 강력한 추위와 맞서 싸우는 맛은 없겠지만 여수의 낭만은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시원하게 한판 잘 달리고 떡국 세 그릇 잘 먹고 나서 이렇게 외치고 싶다. “춥다고 쫄지 말자.”라고.


오늘 글 중에 여러 번 거시기를 언급해서 좀 거시기한데, 독자들의 이해와 인내가 필요하다.

                                    ('마라토너와 사형수' 중에서​)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마라톤 그것도 극한적인 상황에서 펼쳐지는 마라톤의
묘미와 그 과정을 견뎌내야하는 정신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다른 세계의 얘기 같아 실감을 제대로 못하는 처지에서
다른 행성에서 벌어진 일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박래여님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본투런 이란 책 생각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