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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시스테마'를 생각한다(2014년 11월 음악회) > 자유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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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엘 시스테마'를 생각한다(2014년 11월 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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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창우 댓글 1건 조회 952회 작성일 20-07-18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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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어두워질 때 .......

 

초등학교 시절 배운 동요가 생각나는 계절이다. 나는 이 동요를 5학년 때인지 6학년 때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담임선생님한테 배웠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여자 선생님이 담임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을 만큼 여자 선생님 복이 지지리도 없었다. 이 노래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6학년 때 2년 연속 담임을 하셨다.


당시 나의 담임 선생님은 남자 선생님이면서도 풍금을 잘 쳐서 음악시간에 손수 풍금을 쳐가며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셨다. 당시만 하더라도 풍금 칠 줄 아는 선생님이 별로 없을 때라 담임 선생님이 풍금을 못 치는 반은 풍금 칠 줄 아는 선생님이 대신 들어가 노래를 가르쳐주곤 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 당시는 선생님들도 여자 선생님들은 별로 없고 남자 선생님들이 압도적으로 많던 시절이기도 하다. 지금하고는 선생님들 남.녀 비율이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풍금만 잘 치는 게 아니고 못 하는 게 없을 정도로 만능이셨다. 서예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매주 토요일 특활시간에는 대부분 서예를 가르치셨다. 그래서 덕분에 나도 열심히 서예를 배우고 연습해서 서예 경연대회에 나가 상도 받은 적이 있는데, 나의 서예생활은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끝이 났고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영원히 붓을 놓고 말았다. 만약 내가 중학교 들어가서도 계속 서예를 해서 그 길로 빠졌다면 아마 지금쯤 서예의 대가가 됐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또한 그림도 잘 그렸다. 게다가 운동도 잘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선생님은 매일 아침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학생들에게 당시의 국내외 정세에 대해 브리핑을 해 주시곤 하셨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선생님이 아침 조회 시간에 자유 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지금 월맹군한테 함락되기 일보 직전에 몰렸다. 미국한테 원조 받은 무기들을 월남 군인들이 팔아서 술 사 쳐먹고 그러더니 저렇게 된 것이다.”라는 식으로 안보 브리핑을 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어린 마음이지만 월남 군인들이 뭔가를 잘 못해서 망하는구나라는 판단을 한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선생님은 그 당시로도 보기 드문, 가르치는 열정이 대단했던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 열정이 꼭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선생님은 학생들이 조금만 눈에 거슬려도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그 선생님의 폭력성은 학교 모든 남학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수업시간에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학생이 있으면 선생님은 분노한 목소리로 해당 학생을 교탁 앞으로 불러낸다. 학생이 벌벌 떨며 교탁 앞으로 나오면 선생님은 일단 쇠줄손목시계를 척! 풀어서 교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 나서 학생의 싸대기를 힘껏 후려친다. 그러면 대부분 학생들은 선생님의 강력한 펀치에 퍽퍽 나가떨어지고 우리들은 숨 죽이며 그 장면을 지켜본다.

나도 한번은 뭔가 선생님의 눈에 거슬려 거의 초주검이 되도록 흠씬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봉걸레자루로 나의 하체를 얼마나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지, 개 패듯 두들겨 패는데, 나는 엉엉 울며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야 했고, 그날 집에 와서 부모님한테는 선생님한테 맞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말해봤자 오히려 부모님한테 혼날 것 같아서) 방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조용히 부엌 부뚜막에 앉아서 팬티를 벗어보니 엉덩이는 피칠갑이 되어 있었고 팬티에 피가 엉겨붙어 굳어서 팬티가 잘 벗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그랬다가는 그 선생님은 아마 구속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무튼 그때 그 시절은 그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요즘 학교 분위기가 어떤가.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하고는 완전 딴판이다. 그놈의 인권타령하는 통에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지도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요즘 선생님 노릇 하기가 힘드니 명예퇴직 신청한 선생님들이 너무 많아서 명퇴 신청해봤자 웬만해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한다.


나하고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80년대에 공주사범대학을 나와서 현재까지 충청도 어느 시골에서 중학교 영어 교사로 재직 중이시다.

80년대만 하더라도 공주사대는 전국 사대 중에서는 서울사대 다음으로 알아주는 명문 대학이었다. 내가 나의 여동생이 공주사대를 나왔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이렇게 여동생이 공주사대를 나올 정도로 우리 집은 뼈대가 있는집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동생이 혼기가 차서 부모님들이 제발 시집 좀 가라고 해도 시집가란 부모 말씀 어기고 나이 40이 넘을 때까지 시집을 안 가고 부모 속을 썪였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시원한 가창력으로 얘야 시집가거라라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 정애리가 생각나는데, 안타깝게도 그 가수가 몇 달 전 별세했다는 소식이다. 결국 여동생이 나이 40 넘어 겨우 시집을 가긴 갔는데, 다행히 좋은 신랑 만나 호강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동생이 학생들에게 지금까지 20년 넘게 너무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건강도 많이 나빠지고 지쳐 있어서 명퇴를 신청하려고 맘은 먹고 있지만 순번에 밀려 아예 명퇴 신청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나의 여동생도 남달리 열정과 사명감이 넘치다 보니 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외경심을 가져야 교육이 제대로 된다. 선생님이 좀 무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교육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물론 나라의 정책 탓도 있고 시대적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지금 학교 분위기가 이렇게 된 것은 학교에 남자 선생님이 절대 부족한 탓도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초등학교에서는 남자 선생님들을 로또, 또는 천연기념물이라고 한다던데, 이거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자 선생님이 상대적으로 남자 선생님보다 가르치기에 유리한 점도 물론 있겠지만 남자 선생님들의 장점에 비할 바는 못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춘천마라톤에서 생체실험의 고통을 이겨내고 가을의 전설이 된 이후 허전함과 쓸쓸함에 빠져 지내던 중 대전 예술의전당에서 괜찮은 음악회가 연이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11월에만 세 번 대전 예술의전당에 다녀왔다.


115, 대덕오케스트라의 베토벤 특집공연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악성(樂聖) 베토벤 특집 공연이라는데, 나 정도 되는 자칭 클래식 마니아가 안 가면 베토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연주 곡목은 베토벤/에그몬트 서곡, 베토벤/바이올린 협주곡, 베토벤/교향곡 제7번 등이었다.

에그몬트 서곡은 베토벤의 피델레오 서곡’, ‘코리올란 서곡’,‘레오노레 서곡등과 함께 베토벤의 4대 서곡이라고 오래전에 들은 기억이 있는데,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베토벤이 교향곡 제7번을 1812년에 작곡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는데, 1812년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란 작품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812,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지만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러시아군의 초토화 전술(작전상 후퇴하면서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식량을 없애버리는 작전)에 말려들어 결국 패퇴하면서 살아 돌아온 병사는 10분의 1도 되지 않았고, 이후로 나폴레옹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1882년에 초연되었다는데, 바로 이 1812년 러시아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한 곡이라고 한다. 클래식 음악을 듣다 보면 역사 공부가 될 때가 많다. 베토벤(1770~1827)과 나폴레옹(1769~1821)은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가 비슷해서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산 친구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인데, 생전 두 사람이 가끔 만나서 막걸리라도 마시며 우정을 쌓았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오늘 연주 곡목에는 없지만 베토벤은 웰링턴의 승리라는 전쟁교향곡을 작곡했는데, 내용은 1815년 나폴레옹 최후의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워털루 전투장면을 묘사하는 곡이다.

1815, 나폴레옹은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과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대서양의 고도(孤島)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최후를 마친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이라는 걸출한 영웅 덕분(영웅인지 전쟁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에 시대의 거장들인 베토벤과 차이코프스키에 의해 두 개의 불멸의 곡이 탄생한 셈이다.

내가 20대 초반 무렵 클래식에 본격적으로 빠지게 만든 곡이 바로 이 웰링턴의 승리라는 곡이었다. 처절한 전투 장면을 웅장한 음악으로 멋지게 표현한 곡이라고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다.


대전시립교향악단에서는 다음 달(12)에 대전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의 교향곡을 1번부터 9번까지 전곡을 하루에 두 개씩, 5일에 걸쳐 다 연주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베토벤 교향곡 퍼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5일 동안 다 가서 들을 수는 없어서 베토벤 교향곡 5.6번을 연주하는 3일차 되는 날에만 꼭 다녀오려고 한다.


베토벤 교향곡 5운명은 클래식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는 너무나 유명한 곡이고, 베토벤 교향곡 6전원은 내가 20대 초반 무렵 잠자리에서 머리맡에다 카세트테이프로 이 음악을 틀어놓고 잤을 만큼 이 곡을 좋아했고 요즘도 여전히 이 곡을 즐겨 듣고 있다.

 

119일에는 조윤범이 리더로 있는 콰르텟X(현악4중주단)의 공연을 보러 갔다. 물론 나는 현악4중주단 같은 초미니 악단의 연주는 별로 선호하지 않고 오로지 대형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사운드를 즐기는 걸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번 콰르텟X의 공연에 간 것은 순전히 조윤범이라는 젊은 음악가 때문이다.

                                              (2부에 이어집니다)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학교 다닐 때 예체능 과목에 유독 맹추라서 아마도 예체능 과목이 교육의 주된 내용이라면
일찌기 학교를 중도에 포기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체능에 뛰어난 소질을 보이거나 그쪽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보면
나와는 유전인자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음악, 미술, 체육 옆에만 가면 왠지 작아지는 자신이 싫지만
현실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베토벤, 차이코프스키 듣기만 해도 어지럽지만
무척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