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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닮을 걸 닮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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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4건 조회 1,041회 작성일 20-08-11 07:07

본문

닮을 걸 닮아야지

 

요즈음 우리 집은 농사에 비유하면 약() 풍년이다. 아내가 올해에 들어서면서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약 복용이 시작되었다. 나 역시 다섯 해 전부터 기저질환*으로 같은 처지가 되었기 때문에 내외가 공교롭게도 녹록치 않은 길에 들어선 셈이다. 이런 절박한 처지에 몰리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집안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그 옛날 풍년이면 거둬들인 알곡이 집안 여기저기에 그득했던 것처럼 약 보따리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나뒹군다. 내외가 강골에 강건한 축에 끼이지 못해도 입에 약을 달고 살아오지 않았었다. 그런데 고희의 고개를 넘기면서 시나브로 쇠잔해진 체력 때문일까. 나는 가볍게 스쳐 지났다고 여겨지는 뇌졸중, 아내는 담낭(쓸개)의 담석으로 담낭절제로 쓸개 없는 여자로 추락했다. 그런 때문에 내외가 약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될 궁색한 상황으로 몰려 허둥대며 쓸쓸한 황혼녘을 맞아 씁쓸함을 곱씹고 있다.

 

우리 내외는 뛰어난 체력을 지닌 태생이 아닐지라도 약골로 골골거리며 문턱이 닳을 정도로 병원을 드나들지 않았었다. 그런 까닭에 심한 신양(身恙)을 얻어 되게 앓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을 받았다 해도 적절한 치료나 안정을 취하면 가볍게 털고 일어서 정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회복이 가능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는 세월을 이길 재간이 없었던가, 기껏해야 고희의 중반을 바라보거나 살짝 넘어선 처지이다. 그럼에도 약에 의존하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을 지경에 이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몽니를 부려 봐도 부질없으니 애꿎은 세월을 탓해야 할까보다.

 

벌써 다섯 해(2016) 전의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갑자기 블랙아웃(blackout) 현상에 빠져 일곱 시간 남짓 기억을 잃었다가 정신을 되찾고 그 다음날 병원을 찾아가 며칠에 걸쳐 자기공명영상(MRI)검사, 뇌파검사, 채혈검사, 심전도검사, 신경초음파검사, 심장초음파검사 따위를 받고 최종적으로 가벼운 뇌졸중이 지나갔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로 인해서 이승의 삶을 접는 날까지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현재까지 매일 변함없이 오메가3 연질 캡슐(capsule) 2개를 비롯하여 아스피린을 포함한 알약 5타블릿(tablet) 등 모두 7개의 약을 복용하고 있다. 결국 건강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비루하게 약에 기대야 하는 옹색한 처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쭈뼛거려지고 난감하다. 그리고 정기적인 건강 체크를 위해 4개월마다 병원을 찾아가서 주치의에 진료를 받고 처방에 따라 약국에서 약을 받아온다. 그런데 단골 약국의 나이 지긋한 여자 약사는 약국에 들 릴 때마다 위로한다. 건강관리 잘해서 다섯 해 동안 약 처방 내용이 한결같은 것이라고.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헷갈리지만 기저질환을 모시고(?) 살면서 주기적인 검진을 받으며 장기적으로 투약하는 노인들의 약이 오랜 기간 똑 같은 경우는 흔치 않단다. 그런 맥락에서 건강관리를 잘한 것이라는 얘기이다. 심성이 비단결같이 고운 약사가 심란해할 노령의 환자에게 건네는 솔깃한 입발림이라 해도 귀에 거슬리지 않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그러려니 위안으로 여기는 내가 어쩌면 덜떨어진 어바리일까.

 

올 해(2020) 정월이었다. 첫 주말을 맞으며 아내가 복통을 호소해 집에 있던 약을 복용시켰는데도 차도가 없을 뿐 아니라 정신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끙끙 앓았다. 며칠을 기다려도 나아질 기미가 없어 진동한동 서둘러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급히 진찰을 받는 한편 입원조치를 취하고 X-Ray 검사, 혈액검사, 소변검사, CT촬영, 위내시경검사(위암 판정을 위해) 따위를 통해 담낭 결석으로 판명 되었다. 웬일인지 담낭(쓸개) 속에 은행(銀杏) 알만한 돌이 3개나 들어있는데 간수치가 높아 곧바로 수술이 불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대충 한 달 남짓 고생을 하며 두 번에 걸친 복강경 수술로 담낭을 떼어냈다. 결국 아내는 쓸개 없는 여자가 되어 나처럼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약의 복용을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한 달 또는 두 달에 한 차례 병원에 찾아가 주치의에 진료를 받고 처방해 준 약을 받아온다. 투약의 명세이다. 매일 알약 4타블릿을 위시하여 6개의 캡슐 등을 복용한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내 역시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서러운 신세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되게 께름칙하고 영 마뜩치 않다.

 

내가 서른하나, 아내가 스물일곱에 가정을 꾸리기 시작했으니 어언 마흔여섯 해째인가. 적지 않은 세월을 동행해온 생의 동반자라도 여러 모로 많이 달랐다. 우선 나는 컴퓨터 분야를 공부하고 그쪽에서 일했는데 비해서, 아내는 그림을 전공한 미술학도였다. 서로의 전공 쪽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각자의 영역은 절대로 넘보거나 간섭할 계제가 못되었다. 또한 아내의 성격은 이지적이고 차분한데 비해 나는 다소 즉흥적이면서 소극적으로 판이했다. 한편 나름 건강을 겨냥해 선호하는 운동 또한 사뭇 성격이 달랐다. 아내는 안방마님처럼 우아하게 보이는 수영을 수 십 년에 걸쳐 꾸준히 해오고 있다. 이에 비해 나는 머슴처럼 신역이 고되고 시종일관 발품을 팔며 터덜터덜 걸어야 하는 등산에 매달린 지 스무 해가 훌쩍 넘었다. 이처럼 사소할지 모르지만 우리 내외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적지 않은 틈새가 숱함에도 심한 갈등이나 덜컹대는 불협화음 없이 가정을 꾸려오고 있다. 하기야 그 이면에는 첨예한 대립의 실마리가 발생하거나 메꾸기 힘든 간극이 드러날 때마다 지혜롭게 양보하던 현명한 아내가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 따라 나이 듦은 세상도 사람도 변하게 만드는가. 젊은 날 우리 내외는 서로 닮은 구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랬는데 세월이 지나며 시나브로 서로를 조금씩 닮아가면서 이해하려고 힘을 기울이고 있다. 생각하는 바나 행동을 비롯해 좋아하는 음식이 그렇고, 심지어 TV를 시청하다가 눈물을 찔끔거리는 묘한 버릇까지도 오십보백보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노래까지 엇비슷해졌다. 조금 결이 다르지만 아내의 조언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걸을 때 허리가 점점 더 앞으로 굽어지는데 제발 곧게 펴라. 이는 절대로 험을 잡기위해 쓸데없이 내뱉는 허튼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이는 사돈 남 말하는격이다. 요사이 어두운 밤에 아파트 내의 둘레길을 함께 걷노라면 아내 역시 앞으로 약간 숙이고 걷는 게 습관으로 굳어졌다. 이 버릇 역시 서로가 닮아가는 증좌가 아닐까. 이승의 영원한 삶의 동반자인 까닭에 이인삼각(二人三脚) 경기를 하듯 억지로 묶여 삐걱대는 쪽보다 한 몸 같아 져 여생을 보내는데 도움이 된다면 이 또한 기쁨이리라. 아울러 늙어가며 부부가 곱고 단아하게 닮아가는 황혼은 아름답고 모두가 축하할 경사이다. 하지만 기저질환 때문에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지도 모르는 약을 복용해야 하는 상황까지 막무가내로 졸졸 따라온 아내에게 솔직히 내뱉고픈 퉁*이다. 아무리 남편이라도 닮을 걸 닮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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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저질환(基底疾患) ; 어떤 병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는 질환으로 고혈압, 당뇨병, 천식, 만성 폐질환 따위를 뜻한다. 이 기저질환을 가지고 있는 경우 바이러스에 노출될 때 건강한 사람에 비해 취약하다는 전언이다.

 

* : 퉁명스러운 핀잔

 

시와늪, 2020년 여름호(통권 48), 2020723

(202054일 월요일)

 


댓글목록

남창우님의 댓글

남창우 작성일

닮고 싶어서 닮는 것은 아닐테지요. 교수님 힘! 사모님도 힘!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교수님!
마지막 문단을 읽다가 시큰하여 눈물이 났습니다.
두 분 다른듯 함께한 세월이 있으니 어찌 닮지 않았겠습니까.
허리가 조금 굽어진다고 해도 오래오래 행복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임영숙 올림

김언홍님의 댓글

김언홍 작성일

가슴이 찡 하네요.
우리 부부와 닮은 점이 너무 많아서,,,,,
평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건강 잘 지키셔서 내외분 오래도록 행복하시길 비손합니다.

박래여님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젊은 날을 반추한다고 돌아갈 수 없는 것이지요. 늙음을 한탄한다고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지요. 앞으로 더 힘들어 질 것을 미리 아시고 쉬엄쉬엄 부부 애 돈독하게 서로 도와가며 살면 아름다운 노후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요즘 반목하던 두 노인이 여전히 반목하면서 치매환자가 되는 바람에 틈새에 끼어 힘들어요. 놔 버리자. 대충 하자. 몸은 조금 수월해졌지만 마음은 아직 무거워요. ㅋ 두 노인이 짐이 되어버리자 저도 지쳐서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이 듭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