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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과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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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2건 조회 1,083회 작성일 20-09-1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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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꽃

윤복순

 

아침운동을 나가다 아파트단지 내 유치원의 조그만 화단에서 과꽃을 보았다. 봉숭아 몇 그루가 꽃을 다갈다갈 달고 있어 그것에 눈을 뺏겨 과꽃은 이제야 알아보았다. 과꽃은 꽃보다 노래 때문에 좋아한다.

대학교 3학년 졸업여행 때다. 설악산등반이었다. 백담사에서 대청봉을 올라 외설악으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오대산까지 일주일의 여정이었다. 기간이 길어서 밥을 해먹어야 해서 걱정이 많았다.

여학생들이 안 가겠다고 했을 때 남학생들이 했던 말이 지금 생각해 보니 격세지감이다. 남자들은 앞으로 쉽게 여행을 다니겠지만 여자들은 결혼하고 애 낳고 약국 개업하면 여행 다니기 어려우니, 자기네들이 많이 도와줄 테니 걱정 말고 한 명도 빠지지 말고 다 가자고 했다.

나와 같은 조였던 Y가 전날 결석을 해서 여행 동안 먹을 반찬이 내 차지가 되었다. 반찬준비는 여학생 몫이었다. 그 당시로는 당연한 일이다. 부담감 때문에 포기하고 싶었다. 지금도 살림 못하는데 그때는 오죽했을까. 혼자서 장을 보고 시내버스를 타고 버스에서 내려 20여분을 걸어서 집에 왔다. 오후 내내 어머니는 반찬을 만드셨다.

옷가지며 세면도구 등 준비물도 많았다. 반찬은 따로 보따리를 만들었다. 나 혼자 들고 나올 수 없어 어머니가 버스 타는 곳까지 들어다 주었다. 무거운 것도 문제지만 음식이 우리 조원들 입맛에 맞을까가 더 걱정이었다.

시내에선 버스에서 내려 익산 역까지 들고 가는데 팔이 빠져나가는 줄 알았다. 전주에 사는 Y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건선이 심해져 여행 중 고생할까봐 병원 다녀오느라 결석했다고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여행 중 밥하는 것은 자기가 다 맡겠다고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완행열차는 밤새도록 달려 새벽에 서울에 도착했다. 아마 좌석도 없어 통로에 출입문 옆에 잠깐잠깐 앉아 쉬다 얘기하다 갔을 것이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지 한 달여나 되었을까. 우리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지하철을 타본다는 기분에 들뜨기도 했다.

차 시간 기다리는 데 여행일정의 반절은 썼을 것이다. 백담사를 구경하고 어느 산장에서 일박했다. 여학생은 모두 한 방을 사용했는데 인솔교수가 여학생 방에서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남학생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왜 남자가 여자들 방에서 자야는 것이다. 밤늦게까지 얘기를 하고 놀다가 하나 둘 시들시들 잠이 들었다. 어느 누구도 선생님한테 남학생 방에서 주무시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잣대라면 큰 일 날 일이다.

설악산등반은 쉽지 않았다. 배낭은 무겁고 운동화도 편하지 않고 잠도 잘 못자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당장 먹어야 할 반찬인데 조금씩 버리며 배낭 무게를 줄였을까. 남학생 네 명과 여학생 두 명이 한 조였다. 내가 지져 자꾸만 뒤로 쳐지니 남학생이 앞뒤로 서서 왼발, 왼발 하며 구령을 부쳐주기도 했다. 나뭇가지를 주워 한쪽은 남학생이 뒤쪽은 Y가 잡으면 남학생이 끌고 가기도 했다. 다른 조들도 아마 다 그랬을 것이다.

설악산의 단풍은 뭐라 형용할 수없이 아름다웠다. 경사가 급한 곳에서는 숨이 탁탁 막히고 다리에 쥐가 났다. 다리 주무른다는 핑계로 앉아 쉴 때 눈앞의 풍경은 놀랍고 감격스러워 어지러웠다. 이래서 사람들이 설악산 단풍 설악산 단풍 하는구나. 잠시 졸업여행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잠을 설치며 대청봉에 올랐지만 일출은 보지 못했다. 가지고 간 옷 중에 제일 두꺼운 옷을 입었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사회에서도 정상의 자리에 오르면 바람을 많이 타는데... 사람들이 많아 오래 머무를 수도 없었다. 내려올 떼는 그야말로 앞사람 뒤통수만 보고 내려와야 했다.

오대산은 자유등반이었다. 자기 능력만큼 올라갔다 내려왔다. 나는 정상을 찍고 내려왔다. 강릉으로 가는 차안에선 골아 떨어졌다. 살아보니 직진만 하는 사람은 주변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런데 지금도 욕심을 부린다.

오죽헌 경포대 등 강릉 시내를 구경하고 오랜만에 식당에서 밥을 사먹었을 것이다. 준비해간 반찬은 다 떨어지고 다른 조한테 동냥을 해먹는 지경이었다. 식당 밥으로 지쳐있던 세포들이 부활하는 듯 했다. 날씨도 좋았다. 일주일 내내 비도 오지 않았다.

해냈다는 성취감과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들뜸으로 모두들 말이 많았다. 식당에서 숙소까진 꽤 되었는데 삼삼오오 걸었다. 그때 교수님의 카메라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어제 밤 여관에서는 분명히 있었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없어졌다는 것이다.

들떴던 마음이 금세 축 쳐졌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여태껏 떠들썩했던 말소리가 잦아들어 고요하다 못해 적막이었다. 그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마음이 무거워 발걸음도 자꾸만 느려져갔다.

이때 앞에 가던 누군가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노래를 불렀다. 이런 때 웬 노래? 눈이 커지며 서로서로 바라보았다. 노래가 끝날 때쯤엔 모두 같이 불렀고, 처음부터 다시 불렀다. 노래 못하는 나도 따라 불렀다. 교수님도 불렀다.

동요는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게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있었다. 잃어버린 카메라도, 교수님이 여학생 방에서 잤다고 불편해 했던 눈들도, 밥할 때 뺀질이 같이 조금도 도와주지 않았던 아무개에 대한 얄미움도, 등반할 때 어린애 마냥 꾀를 부려 차를 한 대를 놓치게 한 그녀에 대한 성토도, 부실한 반찬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일출에 대한 미련도 노래 부르는 동안 다 녹아내렸다.

소소한 가을밤 과꽃 노래로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고 어떤 이질적인 섞임도 없었다. 수수했다. 그날 그 얼굴들이 어제인 듯 눈에 선하다.

내일 아침 운동 나갈 땐 과꽃과 더 오래 눈을 맞춰야겠다.

2020.9.7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저는 대학 3학년 겨울방학 2달에 걸쳐 주월국군 대학생 위문단 일원으로 월남(지금의 베트남)에 다녀와(1968년 1월 김신조가 청와대 폭파하겠다고 침투했을 무렵), 그 다음해 봄학기에 제주도로 가는 대학 졸업여행을 빠졌습니다. 그 때 적당히 다녀 오는 건데 2달 동안 주월군 위문을 갔다와 몇 달 뒤에 연이어 제주도 간다는 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하기야 청주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1964년이던가) 제주도로 수행여행을 다녀왔던 경험 때문에 포기했는지 모르지만...., 그 이후 학교에 있으면서 학생들 수학여행에 지도교수로 참여했었지만 별로 재미가 없었답니다. 여행도 제때에 다녀야 재미있는것인데.....

남창우님의 댓글

남창우 작성일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를 목놓아 부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