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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인정*에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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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0건 조회 1,024회 작성일 20-10-20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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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에 등산

 

손주 유진이와 인시(寅時)의 한가운데 오전 4시 정각인 인정(寅正)에 집을 나서 등산을 다녀왔다.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동네 뒷산인 청량산을 100번 이상 오르내리던 애호가(mania)였다. 그런데 5학년 무렵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발길이 뜸해지면서 외면한 채 지내왔었다. 올 봄 중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역병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 때문에 입학식도 없이 개학을 몇 차례 연기하다가 초유의 온라인 개학(416)을 했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다가 격주로 등교(68)를 하는가 싶더니 시부지기 여름방학(818)을 맞았다. 다가오는 화요일(91)2학기 개학이란다. 어쩌면 정상적인 중학생활과 사뭇 다른 요상한 경험을 거듭하며 정신적으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사이의 경계인에 머물며 가치관이나 믿음의 관점에서 갈등을 겪고 있지 싶다. 그런 연유였을까. 어제 저녁에 유진이가 뜬금없는 희망을 피력했다.

 

내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등산을 다녀왔으면 좋겠다.”

 

이유를 물었더니 최근 우리 동네에서도 코로나-19 감염자가 나타났다는 께름칙한 소식에서 연유했다는 얘기였다. 아파트 관리 사무소의 되풀이 된 경고 방송을 듣고 꼼짝없이 집안에 유배되어 답답하고 지겨워서 모색한 묘책 중에 하나라는 이실직고였다.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폭서기에 한낮 등산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역천(逆天)에 가깝다. 해마다 이 절기에 이르면 새벽 등산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게 순리이고 수월하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결국 요약하면 아이가 어수선한 마음을 달랠 요량으로 그 길에 내일 아침 자청해 동참하겠다는 선언이나 진배없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평소 잠든 아이를 깨우려면 한식경(一食頃)을 훌쩍 넘게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가 숱하다. 그런데 오늘은 할머니 옆에 잠든 아이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귀에 대고 등산 가려면 일어나야지!”라고 속삭였다. 군소리 한 마디 없이 감전이라도 된 듯이 벌떡 일어났다. 등산에서 돌아와 제 할머니에 물어봤더니 자기는 아이를 기상시켜 방밖으로 나가는 낌새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했다. 한 밤중에 잠에서 깨어나던 아이 행동을 미루어 짐작할 때 무의식적인 상태일지라도 마음가짐에 따라 전혀 다른 양태(樣態)를 나타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방에서 빠져나와 서둘러 등산 채비를 마치고 물을 한 병씩 들고 정확히 인정(寅正)에 현관을 나섰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야무지게 마스크를 챙겼다.

 

우리나이로 14살이며 기껏해야 중학교 1학년일 뿐인데 이제 나와 눈높이가 같거나 위에서 나를 내려다 볼 정도로 훌쩍 자란 모습으로 체중이 50kg에 이른 힘(power) 때문일까. 깜깜한 사위(四圍)를 뚫고 아파트 경내를 벗어나 이웃 아파트 담벼락 사이의 완만한 오르막길을 지나 등산로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내닫았다. 그런데 쫄래쫄래 뒤따라가기 힘겨워 한 박자 속도를 늦추라고 이르기를 몇 차례 되풀이했다. 아마도 아이는 정상 속도이련만 내가 따라가기 벅차기 때문에 쓸데없는 헛소리를 내뱉었지 싶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나서 등산을 마칠 때까지 아이의 발걸음을 따라갈 재간이 없어 중간에 쉬어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거듭하면서도 차마 그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20년을 훌쩍 넘긴 등산 이력임에도 겨우 풋내기 아이의 체력에도 대책 없이 밀려 헉헉대며 늙어 감을 핑계 대는 게 합당한 변명일까. 오늘 새벽 아이와 등산을 하면서 62살이라는 나이 차이인데다가 쑥쑥 자라나는 아이들과는 견줄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제대로 깨우쳤다.

 

비 뒤끝 때문인지 사방에 안개가 자욱해 사위가 유독 어둡고 깜깜했다. 그래서 등산로 입구에 이르렀는데도 여명이 밝아오려면 아직 멀어 보였다. 인정을 20분쯤 지난 시각에 된비알의 비탈길의 등산로로 들어섰다. 아이가 손전등을 밝히고 선두에 섰고 그 뒤에 내가 자리하고 내 뒤엔 길동무 역시 손전등으로 길을 밝히며 정상으로 향했다. 서너 해 전쯤에 지금 뒤따르는 길동무가 여러 차례 등산에 아이와 동행했던 적이 있다. 그런 그가 그 동안 몰라보게 쑥쑥 성장한 아이에게 애정 어린 덕담을 했다. 무뚝뚝한 사내 녀석이라서 사근사근한 멋대가리가 도통 없는 때문일까 아니면 천성 때문일까? 오랜만에 다시 만나 애정 어린 덕담을 해주시며 묻는 말에 ”, “아니오식의 답으로 응대해 대화가 끊기기 일쑤여서 중간에 낀 내가 되레 민망해 혼났다.

 

한없이 어리고 여려 모든 면에서 성에 차지 않았었다.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함께 등산을 해보니 유진이의 보행 속도에 맞추기 위해 내심 헉헉거리며 허둥대는 내가 초라하고 민망해 씁쓸하고 아릿했다. 어느 결에 내 신장을 따라 잡았으며 머지않아 체중까지 엇비슷해질 만큼 한 뼘 더 성장하면 모든 면에서 나를 뛰어넘어 성큼성큼 거침없이 내닫을 모습을 황망한 마음으로 멀뚱멀뚱 지켜보는 게 고작이리라. 모처럼 아이와 동행했던 꼭두새벽의 등산길에서 몰라보게 우뚝 성장한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그 과정에서 별의별 생각을 거듭하다가 식견이 좁고 얕으며 헙헙하지 못한 내 영혼과 조우하는 자성(自省)의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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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寅正) : 인시(寅時)의 한가운데 오전 4시 정각을 뜻한다. 동양 문화권에서 하루를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등 십이지(十二支)로 등분하고, 이를 다시 초()와 정()으로 세분화해서 자초(子初 : 23), 자정(子正 : 0), 축초(丑初 : 1), 축정(丑正 : 2), 인초(寅初 : 3), 인정(寅正 : 4), 묘초(卯初 : 5), 묘정(卯正 : 6), 진초(辰初 : 7), 진정(辰正 : 8),......., 해초(亥初 : 21), 해정(亥正 : 22) 등 모두 24등분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혼란을 겪기 쉬운 자정(子正)’, ‘0’, ‘12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예를 들면 ‘30일 자정까지 라고 한다면 어떤 의미일까? 여기서 ‘30일 자정‘30일 밤 12또는 “29일이 끝나고 30일이 시작하는 ‘300를 뜻한다. 또한 “93일부터 ○○법이 시행된다고 하면 ‘92일 밤 12부터‘930시부터혹은 ‘93일 자정부터라는 뜻이 되리라.

 

* 내일(來日) :  ‘오늘의 다음날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이 하제이다. 한자어 내일(來日)의 순우리말이 하제이다

 

2020830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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