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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임종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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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1건 조회 1,381회 작성일 20-11-03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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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유감

 

양친의 임종(臨終) 순간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여섯 남매 중에 외아들로 태어났던 때문에 온갖 혜택은 독차지하며 왕자 대접을 받고 성장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신들이 저승으로 떠나시던 그 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선친(先親)의 경우는 고향에 계셨고 나는 마산에 둥지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맹꽁징꽁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핑계라도 댈 수 있으리라. 하지만 선비(先妣)의 경우는 마산에서 함께 지내셨던 관계로 임종의 순간을 지켜드리지 못한 불효에 대해 유구무언이 제격이지 싶다. 이런 연유에서 엿돈이와 호형호제할 외아들일지라도 이승에서 당신들의 마지막 순간을 지킬 수 없는 곁다리 같은 자식으로 태어났던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양친의 임종이라는 관점에서 나의 여섯 남매 중에 맨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넷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덤거리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외동*은 아니라도 금지옥엽 같은 외아들이라는 이유에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지존 같은 융숭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당신들이 이승을 하직하고 떠나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위로 두 누님과 넷째인 여동생은 나와 다름없는 처지이다. 그런데 여섯 남매 중에 다섯째인 여동생이 유일하게 양친이 떠나시는 순간을 모두 지켰고, 여섯째 여동생은 다섯째 여동생과 함께 선친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그렇다고 미혼으로 당신들과 동거하던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도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는 처지이면서도 양친의 생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위태하다는 전갈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와서 병석을 지키다가 운 좋게 임종을 지켰다.

 

선친의 경우는 이 세상에 오며 태()를 묻었던 당신의 고향에서 영면에 드셨다(19851025(음력 912)). 젊은 날엔 무척 건강하셨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 무렵 얼추 2년쯤 노환으로 병고를 겪었다. 몇 번인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마산에서 진동한동 불원천리 길을 달려가기를 거듭했었다. 세상을 뜨시기 전 주일 일요일에 병세가 눈에 띄게 호전된 모습을 뵙고 왔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중에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밤을 새워 달려갔음에도 싸늘한 주검으로 명을 달리하여 이승의 모습을 뵐 수 없었다. 첫 새벽에 도착하니 다섯째와 여섯째 여동생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외아들로 태어난 내게 세상의 모든 것을 몽땅 쏟아주셨음에도 당신의 저승길엔 손도 잡아드리지 못한 죄가 가볍지 않아 마음이 몹시 저어하다*.

 

선비의 경우는 마산에서 함께 사시다가 이승을 뒤로 하고 표표히 북망산천으로 떠나셨다(1992823(음력 725)). 참으로 강단이 있으셨는데 생의 마지막 한 해 정도 고빗사위 같이 힘겨운 노환과 줄 다리기를 하셨다. 때문에 그해 여름방학 동안(6~8)에 날 밤을 꼬박 지새우는 날이 숱했다. 그렇게 방학을 보내고 개학을 맞을 무렵 갑자기 병세가 급전직하했다. 왠지 그날은 예감이 좋지 않아 곁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결강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출근하여 오후 강의에 열중하고 있는데 조교가 급히 쪽지를 전해줬다. “댁에 급한 일이 생겼다니 서두르세요.”라고. 선비의 문제임을 직감했다. 학교와 집이 가깝기 때문에 불과 10분 정도 걸렸을 게다. 이미 주검으로 온 천지가 깜깜한 기분이었다. 마지막 순간 평소처럼 병세가 악화되었다가 다시 회복될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맥없이 숨을 거둬 허망하더란다. 이 임종의 순간 다섯째 여동생과 아내가 함께 지켜보면서 눈을 감겨드렸다고 했다. 명을 달리한 이후에 연락했기에 지척에서 강의한답시고 거들먹거리고 있다가 결국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불효를 저질렀다.

 

입때까지 유일하게 백부(伯父)의 임종을 지켜봤었다. 대학 2학년(1966)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라서 상경을 하려던 날 아침 날씨가 흐려 길을 나서는 게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이웃에 사시는 백부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하루쯤 옆에 있어 드리고 싶기도 했다. 그 당시 백부 슬하에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큰집에 갔더니 끙끙 앓아 누운 백부 옆에 내 선친과 숙부가 긴장한 채 굳은 표정으로 앉아 계셨다. 한 참을 말이 없던 선친과 숙부가 약을 구하겠다며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백부와 내가 얼마나 함께 있었을까. 심하게 앓던 백부께서 일으켜 앉혀달라고 했다. 내 도움으로 벽에 기대어 힘겹게 앉더니 담배 한 대 피고 싶다고 했다. 해롭다고 말씀드렸거늘 거듭 간청해서 권련에 불을 붙여 드렸다. 한두 모금 빨아들이는가 싶더니 기침을 하시며 곧바로 내쳤다. 한식경(一食頃)쯤 앉아 계셨을까. 다시 눕혀 달랬다.

 

눕자마자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려 몇 번이고 닦아드렸다. 그러더니 점점 기운을 잃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다가 마침내 숨이 멎었다. 처음 겪는 순간으로 눈앞이 아득하고 거짓말 같은 현실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팔다리를 주무르며 애타게 불러 봐도 소용없었다. 유언 한 마디 없이 그렇게 총총히 떠나셨다. 주위에 누군가 있는가 싶어서 큰소리를 쳐봐도 적막강산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백모(伯母)도 그 순간 약을 구하러 밖에 나가셨더란다. 그런 황망함 속에서도 반쯤 뜬 백부의 눈을 감겨드렸다. 이제까지 살면서 명을 달리하는 순간을 옆에서 지켜본 유일무이한 경험이었다. 내 뇌리엔 그때 그 순간이 또렷하게 각인되어 아직도 생생하게 회억된다.

 

자식 육남매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선친의 경우는 다섯째와 여섯째 여동생이 임종을 지켰을 뿐이고, 선비의 경우는 오로지 다섯째 여동생만이 아내와 함께 지켰을 따름이다. 한편 나는 비록 외꼭지*는 아닐지라도 귀한(?) 외아들로서 항상 과분한 대접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승에서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드리지 못했기에 불효자라는 덤터기를 뒤집어써도 항변할 길 없는 옹색한 처지이다. 예부터 어른들이 자식이 여럿이라고 해도 임종을 지키는 자녀는 따로 있다고 하던 얘기가 문득 떠오른다. 이런 맥락에서 양친에게 제대로 된 자식은 오직 다섯째 여동생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런데 나는 백부의 임종을 지켜본 유일한 가족이었다. 따라서 양친이 아닌 백부의 임종을 지켜봐야 할 운명으로 태어났던 게 아닐까. 이런저런 관점에서 어버이의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해 충수꾼을 떠올리게 했던 나는 그 허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책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

 

* 외동 : 단 하나뿐인 자식. 다시 말하면 자신 이외의 형제 또는 자매와 남매가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 저어하다(齟齬하다) : 형용사 익숙하지 아니하여 서름서름하다. 형용사 뜻이 맞지 아니하여 조금 서먹하다. 동사 염려하거나 두려워하다.

* 외꼭지 : 몇 대 동안 외자식이 이어진 가문의 외자식

 

한맥문학, 202011월호(통권 362), 20201025

(202091일 월요일)


댓글목록

장은초님의 댓글

장은초 작성일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시어머님을 보내던 날(2016년 7월8일)이 생각납니다.
위독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서울에서 대구로 달려갔지요. 말년에 요양병원에서 지내셨던 시어머니께서  호흡이 곤란하셨지요.
자식들이 모두 모였는데 한고비 넘겼다해서 모두 돌아가시고 우리 내외만 병상을 지켰습니다.
평소 멀리 있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해 오늘밤이라도 우리가 옆에 있겠다 자청했는데 갑자기 한밤중에 병세가 악화되어 눈을 감으셨습니다.
제일 뺀질이(?)가 큰형님네, 둘째형님네를 제치고 우리가 임종은 본 자식이 되었지 뭡니까.
그 또한 여간 죄송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임종을 지켜볼 만한 자식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맏이에겐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을텐데 가로챈 것같아 아직도 마음에  미안함으로 남아있습니다.

선생님, 잘 계시는지요? 어느덧 가을도 저만치 가고 있네요.
건강 조심하세요. 너무 차운 날은 다니시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