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드림출판사

숟가락만 얹었다 > 자유창작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고객센터
상담시간 : 오전 09:00 ~ 오후: 05:30
(주말 및 공휴일 휴무)
02.2612-5552
FAX:02.2688.5568

b3fd9ab59d168c7d4b7f2025f8741ecc_1583557247_0788.jpg 

수필 숟가락만 얹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윤복순 댓글 1건 조회 1,192회 작성일 20-11-07 18:20

본문

숟가락만 얹었다

윤복순

 

일요일, 우리 포도밭 농사를 지었던 아저씨가 당신네 밭에 와서 풋고추를 따 가라고 한다. 장마로 고추가 안 되었는데 늦게야 고추 잎과 풋고추가 여간 좋은 게 아니란다. 올해는 남편이 안식년을 한 관계로 농삿일하는 재미가 없었다. 오랜만에 수확하는 손맛을 볼 수 있겠다 싶어 신이 났다.

비타민을 가지고 갈까, 고기를 사 갈까, 그릇은 몇 개나 가지고 갈까, 누구랑 나눠먹을까. 고추 따러 갈 재미에 기분이 가을하늘 보다 더 높다. 나도 나눠줄 수 있다는 생각에 머릿속은 은행잎의 노랑보다 더 밝다.

이때 전화벨이 요란하다. 일요일 시간이 어떠하냐는 후배다. 다른 때 같으면 무조건 좋아 인데 왜 하고 물었다. ‘약사문예회원 두 명이 익산에 온단다. 바로 나가겠다고 했다. 그녀들이 서울에서 온다는데 후배 혼자보다는 함량미달이지만 곁에 있어줘야 할 것 같았다.

매년 책도 내고 문학기행도 가는데 나는 한 번도 참석해본 적이 없다. 글만 내고 책만 받아본다. 얼굴은 모르지만 글로써 이름은 안다. 후배가 문학기행에 참석했고 카톡방에서 자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올해 문학기행을 익산으로 정했단다.

연초, 가을에 12일로 익산에 온다고 해 멀리는 못가도 익산에선 참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졌다. 9월로 잡혔다가 연기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1단계로 낮춰졌지만 많은 인원이 올 수 없어 두 명만 온다. 고추 따러 가는 것보다 마음이 더 달뜬다.

익산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약사라는, 글을 쓴다는, 동료의식으로 어색함은 없다. 후배와 그들은 안면이 있고 단톡방에서 많은 대화를 나눠서 엄청 친해 보였다. 나는 후배를 많이 좋아한다.

후배가 맛보기라며 차를 세웠다. 매년 천만송이국화축제를 하는데 올해 약식으로 하는 행복정원이다. 사람들이 잘 몰라 한가하니 여유롭다. 핑크뮬리는 아침이슬을 맞아 아래 부분이 물안개가 낀 것처럼 하얗게 몽실몽실하다. 초면인 문인들과의 익산여행, 부풀은 내 마음 같다.

이병기문학관을 찾아간다. 네비게이션을 찍고 가는데도 같은 곳을 두 번이나 지나가게 한다. 후배가 여름에 사전답사까지 다녀왔다는데. 나는 오래 전 구 도로로 다녀왔고 최근에는 가지 않았다. 옆에서 조수도 해 줄 수가 없다.

보석박물관 주차장으로 갔다. 이럴 땐 잠시 쉬는 게 상수다. 후배는 웰컴 투 드링크라며 손수 만든 수정과와 찐 계란을 내놓는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온 기분이다. 햇볕이 기분 좋게 어깨에 내리고, 하얀 솜털구름이 튀밥 터지듯 웃어대고, 하늘은 어린 아이의 눈동자만큼이나 맑다. 이런 날 무엇을 한들 최고의 날이 되지 않을까.

시심이라도 자극하려는 듯 구절초가 만발한 언덕에 정자가 있다. 올라가는 길에 너무 수수해서 더 고결해 보이는 선비 같은 집도 한 채 있다. 시끌벅적했던 그녀들이 단박에 조신해졌다. 푸른빛이 담겨있는 저수지를 바라보는 정자라는 함벽정. 고상하고 담담한 관리사와 아름답고 화려한 함벽정, 환상의 조합이다. 우리들 같다.

가람 이병기선생의 생가와 문학관은 우리가 전세를 냈다. 시비 앞에서 시낭송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모과와 탱자가 문학관에는 들어가지 말고 저희들과 놀자고 한다. 특히 탱자나무는 200년이 된 것으로 전라북도 기념물이다. 떨어진 탱자와 모과를 하나씩 주웠다.

술과 제자, 난초를 사랑한 삼복지인 가람선생의 활동상과 유품 등을 둘러보았다. 한글을 사랑하고 후학양성에 헌신하신 모습이 난초와 닮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난초의 시화가 벽을 꽉 채우고 있다. 올곧은 당신이 익산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예를 다해 머리를 숙이고 나왔다.

춘포문학마당도 갔다. 호남평야 들녘과 만경강이 사이좋게 있다. 들녘의 누런 벼와 만경강의 억새가 최고의 절정이다.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와~ ~ 소리를 질렀다. 홍석영,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 안도현, 등등 익산 작가들의 작품비가 세워져 있다. 윤흥길 선생이 잠깐 춘포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한 인연으로 만경강변 중 춘포에 문학마당을 만든 것 같다. 춘포정이란 현판도 선생 글씨다.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내용을 나누는 재미에 바람 햇살마저도 최상이었다. 이 최상을 보여주기 위해 후배는 무더운 여름부터 여러 번 조사차 다녀갔다고 한다.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다른 곳의 코스모스는 다 시들었는데 만경강둑의 코스모스는 최고의 컨디션이다. 추수하는 아저씨를 보며 일요일 넘어서 해야 하는데...” 황금들판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안타까웠다고 한다.

억새천지인 만경강, 강둑에서 보면 강이 아닌 것 같다. 강물을, 만경강의 민낯을 보여주기 위해 강변을 달린다.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같이 억새속의 강물이 보인다. 또 다른 운치다. 후배의 준비성을 누가 당하리.

서울에서 온 그녀들이 실컷 웃었고, 익산은 처음인데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고, 마음만 먹으면 당일치기로 쉽게 찾아올 수 있겠다고, 오늘은 선물이라고, 언제 우리 넷이서 진도여행을 하자고 한다. 후배한테 한 소리인데 눈치 없이 내 마음에 풍선이 달린다.

마무리는 수목원에서 했다. 가을의 진객 금목서 은목서가 있는 곳이다. 금목서는 거의 질 때인데 올 가을 비가 없고 맑은 날씨 때문인지 절정의 상태로 우리를 맞는다. 샤넬No.5의 향기 아래 그녀들의 수다는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광주의 시인약사도 합류했다.

익산에 볼거리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단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미륵사지도 못 들렸고, 소라단길을 같이 걸으려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생략했다. 백제의 수도였던 왕궁 터도,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쌍릉도, 많은 문인을 배출한 원광대학교도 다음에 같이 하자고 했다.

점심 저녁식사시간을 맞추고 메뉴까지 한 점의 빈틈없이 후배가 다 예약을 해 두었다. “맛집이야?” 입에 딱 맞는다고 그들이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익산은 맛집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어느 식당에 가든 그 집이 바로 맛집이라고 전라도 음식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열차시간에 맞춰 익산역 까지 배웅했다.

후배 혼자 애쓸 생각에 고추 따러 가는 약속을 접고 나섰는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숟가락만 들고 졸졸 따라 다닌 꼴이다. 염치 좋게 10월하면 익산문학기행을 앞자리에 놓을 것이다.

 

2020.10.26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선약인 고추따기보다 우선 순위가 앞선 낯선 서울 문우들과 함께 찾았던 국화축제, 이병기 문학관, 춘포문학당, 만경강 드라이브 등을 했던 문학기행 매우 즐거우셨겠습니다. 하기야 선생님은 너무도 낮익은 곳이라서 의무 방어전 치루듯 하셨을지 모르지만, 서울에서 방문했던 두 작가는 영원히 잊지못할 추억이 될 것 입니다. 다음에 약속했던 문학기행 혹은 여행 꼭 이루어지시기를 또한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