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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바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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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2건 조회 1,245회 작성일 21-03-2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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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맞다

윤복순

 

봄바람은 일손이 바쁜 농부에게도 칠십의 노인에게도 콧바람을 쐬러 가라고 엉덩이를 떠민다. 햇살이 좋고 낮의 길이도 길어졌다. 이런 날 일만 하는 것은 왠지 많이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봄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만사 제쳐두고 이번 일요일 봄나들이를 가자고 했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올라가고 춘분도 지났다. 점심이 어찌될지 몰라 좋아하지도 않는 빵도 샀다. 밤잠을 설치며 시간 맞춰 아침식사도 준비했다. 언제 갔다뒀는지 모르는 열차시간표에서 출발시간도 확인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딱 맞추는 것 보다 넉넉한 게 좋다. 655분 완행열차인데 서둘러 택시를 탔다. 차표를 사면서 보니 44분 출발이다. 시간을 맞춰 왔더라면 타지도 못할 뻔 알았다. KTX나 새마을은 서지 않아 첫차를 놓치면 두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오늘의 테마는 섬진강의 봄바람이다. 어느 해 곡성부터 광양까지 섬진강을 따라 걸었다. 오늘은 옥정호를 걷는다. 진안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이 아직 큰 강을 이루기 전 새끼 줄기들이 흐르는 것을 막아 만든 호수다. 내가 알고 있는 옥정호는 운암댐인데 임실까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고 싶다.

임실역에 내리니 720분이다. 바람이 쌀쌀하고 안개인지 구름인지 을씨년스럽다. 자전거를 가지고 내리는 사람을 만났다. 그들도 섬진강을 달리러 왔을 것이다. 나는 여행을 꼼꼼하게 알아보고 출발하는 게 아니라 떠나고 싶을 때 무작정 떠난다.

화장실에서 자전거팀의 한 사람을 만났다. 옥정호를 걸을 생각인데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냐고 물었다. 자기도 그냥 따라와서 모른다며 밖에 있는 남자들에게 물어보란다. 남편이 대합실에서 나왔다.

그들에게 물어보자고 하니 싫단다. 내가 화장실 간 사이 뭔가 정보를 얻은 줄 알았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흔한 관광안내 책자도 없다. 역 앞의 안내도에서 현위치를 찾아 읽고 있는데 버스타고 강진까지 가세요.” 그들이 알려준다. 내 남자는 그 나이에 뭐 그리 대단하다고 물어보기를 싫어할까. 저 남자는 아는 것을 나누려 저리 친절한데.

그들이 가고 나니 새벽인데다 날씨마저 춥고 시골이라서 물어볼 사람이 없다.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길을 건너서 타야할지 이곳에서 타야 할지 방향을 못 잡겠다. 그들에게 물어보자니까, 잔소리를 하려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 남자도 없으면 나 혼자 어떻게 놀까, 누가 내 비위를 맞춰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내려가는 것이 아니니 길을 건너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다행히 승강장에 버스시간표가 있다. 바로 버스 한 대가 왔다. 강진에 가지 않는단다. 이쪽에서 타는 것이 맞다. 몇 번 버스를 타냐고 하니 시골이라서 번호가 없단다. 이런 땐 입이 서울이다. 좌충우돌 여행의 묘미다.

버스기사 뒷좌석에 앉아 오늘 걷고 싶은 곳을 물어보았다. 종점에서 내가 가고자 하는 곳 까지 10Km가 넘고, 그곳에서 3개 면을 지나야 하며, 붕어섬이 있는 곳에는 버스가 닿지 않아 면소재지까지 나와야 한단다. 갑갑해 죽겠다는 눈치다.

마침 뒷자리에 그 마을 어르신이 계셨는데 내 하는 짓이 하도 폭폭한지 묻지도 않았는데 한 마디 거드신다. 관촌에서 내려 신평면을 거쳐 운암면 까지 걸으란다. 이곳이 옥정호이며 섬진강의 지류라면서.

관촌에서 내렸다. 이곳은 둘째를 임신했을 때 시어른들과 물놀이를 왔던 곳이다. 사선대만 보고 방향을 잡았는데 강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어느 군부대 가는 길이 나온다. 죽으란 법은 없다. 동네사람을 만났다. 남편이 자진해서 길을 물었고 돌고 돌아 방향을 잡았다.

강둑만 따라 걸으면 된다. 보통 승용차로 30분 잡고 다닌다고 하니 거리를 미루어 짐작한다. 여태껏 길 찾느라 몰랐는데 강바람이 보통이 아니다. 봄바람은 살 속으로 파고든다고 하더니 바늘로 온 살갗을 좆는 것 같다. 임자(壬子) 만났다.

꽃샘추위에 반늙은이 얼어 죽는다고 했던가. 오늘 우리 부부를 두고 한 말 같다. 특히 임실은 전라도 임실이 아니라 강원도 임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내륙지방 특유의 저온현상이 있는 곳이다. 배추가 강원도 고랭지 맛이 있어 매년 김장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마스크를 벗고 신선한 봄바람을 마음껏 느끼고 따사한 햇빛을 온몸으로 받을 계획은 산산이 부서졌다. 마스크가 없었다면 아마 동사하지 않을까 싶다. 코로나19 덕을 봤다.

어제 저녁 일기예보에서 비가 그치고 바람이 많이 불거라고 했지만 이리 심할 줄은 몰랐다. 꽃샘추위가 경칩, 춘분, 청명 뒤에 나타난다고 하더니 어제 춘분 지났다고 밤사이 이리 돌변했다. 강풍경보 재난문자가 뜬다.

악으로 깡으로 강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뱃살이 꼿꼿하고 머리가 띵하다. 추위를 피하기 위해 버스승강장에 들어가 보온병의 뜨거운 물을 마셔봤지만 움직이지 않으니 더 춥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걸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도 해는 나오지 않는다. 버스 한 대 지나가지 않는다. 되돌아가기도 앞으로 가기도, 시간상으론 되돌아가는 편이 조금 낫다. 진퇴양란이란 말은 이런 때 쓰일 것 같다. 우렁이가 외출을 하면 날이 구지다고 하더니 코로나19로 정말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왔더니 역대급 꽃샘추위다.

화투연 (花妬娟)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꽃피는 것을 시기해서 아양을 떤다는 뜻으로 겨울이 꽃피는 봄을 질투해서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추위와 바람의 예쁜 짓을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2월부터 포도넝쿨 자르기, 풀 뽑기, 관리사 짓기, 밭둑의 무궁화 단풍나무 가지치기 등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하루쯤 휴가가 필요해 봄바람 쐬러 나가자고 했다. 내 나름의 예쁜 짓이다. 화투연처럼 겨울의 예쁜 짓이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나쁜 일이듯 오늘 나의 예쁜 짓이 꼭 그 짝이다.

신평에서 옥정호는 끝이 났다. 전주 가는 버스를 타려면 운암으로 가야 한다. 호반길이 없어 산을 넘었다. 산골짝 골바람이 얼굴을 할퀸다. 이쯤 견뎠으면 몸이 적응할 만도 한데 속수무책이다. 산의 정상에 운암면 표시가 있다. 남편이 그 앞에 서란다. 사진으로 남긴다고.

다섯 시간 넘게 걷고서야 면소재지에 도착했다. 매운탕집이 있다. 동네 구경을 하는데 어찌 바람이 찬지 점심에 먹은 밥알이 다 일어선다. 버스는 3시간에 한 대 있는데 30분 기다려 차를 탈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 낸 것에 대한 보상이다.

바람 신나게 맞고 왔다. 이 자신감으로 춘곤증을 이겨내며 봄을 즐길 것이다.

2021.3.21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봄맞이 길이 뜻하지 않은 꽃샘추위의 훼방으로 바람맞이 길이 되셨네요.
한 겨울 단단히 중무장하고 나선 길보다 가볍게 차리고 나선 봄맞이 길의
꽃샘추위가 훨씬 곤혹스럽기 마련이지요.

그래도 두 분이 서로 마음속으로 격려하며 밀고 당기며 걸었던
그길에 대한 추억은 영원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겠습니다.

여긴 오늘(3월 27일) 벚꽃이 만개 했는데,
지금 내리는 봄비가 내일까지 계속 되면
아마도 거의 다 질 것 같아 아쉽답니다.

신외숙님의 댓글

신외숙 작성일

즐거운 봄 나들이 여행 함께 만끽했습니다.
저도 무작정 여행 떠나는 걸 좋아합니다. 요즘 여의도에 벚꽃이 한창이고 진달래와 개나리가 무리져 피어 있어 봄을 실감케 합니다.
코로나만 아니면 여러 곳으로 떠나고 싶네요. 봄 나들이 참 정겨운 단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