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드림출판사

우리말 겨루기와 J여사 > 자유창작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고객센터
상담시간 : 오전 09:00 ~ 오후: 05:30
(주말 및 공휴일 휴무)
02.2612-5552
FAX:02.2688.5568

b3fd9ab59d168c7d4b7f2025f8741ecc_1583557247_0788.jpg 

수필 우리말 겨루기와 J여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판암 댓글 4건 조회 84회 작성일 21-06-29 07:39

본문

우리말 겨루기와 J여사


환갑(還甲)에 이른 초로의 할머니가 ‘우리말 겨루기’*에 도전했다. 그런 J여사가 예사롭지 않게 보일 뿐 아니라 한없이 미덥다. 보통의 경우 괜스레 방송에 출연했다가 전국적으로 남세스러운 꼴을 당하지 싶어 꿈도 꾸기 어려운 언감생심의 도전이었다. 그동안 우리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공부해왔기 때문에 해박한 지식을 여퉜을 뿐 아니라 우월한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나 투미한 우리네와 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뒤늦게 도전 기회를 잡은 게 되레 만시지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우리말 겨루기’ 방송을 마음 졸이며 지켜보면서 우리말 실력이 턱없이 부족한 터수에 외람되게 글을 쓰겠다고 아등바등해온 내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해방둥이로 6.25 전쟁 휴전 무렵의 혼란기부터 시작된 배움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엉성한 배움임에도 맞춤법이나 표기법 등이 대폭적으로 바뀌는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런 영향일 게다. 우리글의 문법이 영문법보다도 어렵다고 느꼈던 적이 숱했다. 이런 취약점을 보완할 요량에서 우수마발(牛溲馬勃) 같은 글일지라도 한편 새로 쓰면 몇 번 되풀이 해 퇴고(推敲)를 하며 바로잡으려 무진 애를 쓴다. 그래도 자신이 없어 내용을 출력하여 아내의 눈치를 봐가며 슬며시 코앞에 밀어 놓는다. 오류를 더덜이 없이 지적해 달라는 뜻이다. 딴에는 몇 차례 퇴고 했는데도 매구같이 오류를 찾아냄으로써 나를 머쓱하게 몰아세우기도 한다. 그럴 경우 때로는 묘한 낭패감이 엄습해도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수정해 적당한 기회를 엿보다가 은근슬쩍 단골 카페에 올리기도 한다.


카페에 글을 올리면 주위의 지인들이 댓글을 달기도 한다. 그런데 댓글의 대부분은 예식장에서 주례의 주례사처럼 덕담 일색이다. 해당 글에 대한 부족한 점을 날카롭게 파헤치거나 잘못된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처음 글을 써서 카페에 발표하던 시절 얘기이다. 나름 완성한 내용을 올리면 칭찬 일색의 댓글로 도배했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 J여사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내 글에 섞인 오류들을 족집게로 집어내듯 들춰내 이메일(e-mail)이나 휴대전화로 넌지시 전하며 일깨워 주기를 수없이 되풀이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적해도 도로 아미타불이라서 실망했던지 어느 때부터인가 뚝 끊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전(改悛)의 가능성이 없어 정나미가 떨어졌던 때문이리라.


장장 50분간 겨루기를 하는 모습을 숨을 죽이며 잔뜩 긴장한 채 빠짐없이 지켜봤다. 함께 출연했던 이들도 쟁쟁했다. 일방적으로 앞서거나 뒤지는 경우 없이 엇비슷해 더더욱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러다가 1단계에서 둘은 탈락했다. 그리고 2단계에서 초로의 신사와 치열한 경쟁을 하다가 끝끝내 우승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그 순간 우리 내외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만세를 부르며 박수를 쳤다,


겨루기가 계속되는 동안 텔레비전 앞으로 바짝 다가가 앉았다.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픈 욕심 때문이었으리라. 만일 내가 출전했다면 초반에 무참하게 나가 떨어졌을 게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까다로운 문제가 대거 출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쭙잖은 나에 비해 그날 출전했던 넷은 다른 행성에서 온 별종들 같아 무척 부러웠다. 그들에 비해 허송세월하며 나잇값도 못한 채 살아온 게 무척 겸연쩍을 뿐 아니라 면구스러웠다.


그날 J여사는 평소에 비해 지나치게 긴장했던 게 분명했다. 녹화를 진행하던 중간에 카메라가 자기를 비추지 않는 순간 탁자 밑으로 앉는 모습이 언뜻 잡혔다. 순간 화들짝 놀랐다. 몸이 약해 주저앉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행동은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던지 탁자 밑에 있던 생수 병을 찾았던 것이었다. 그 순간 오랜 진행으로 위기에 대응이 능한 아나운서가 물을 마셔도 좋다는 멘트를 날렸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머지 셋도 일제히 물병을 들어 목을 축이는 진풍경이 연출되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2단계에서 둘의 겨루기를 승리로 이끌며 우승을 거머쥔 뒤의 정황이다. ‘우리말 달인’에 도전하는 첫 단계에 이르러서도 긴장을 풀지 못한 모습이 더욱 또렷했다. 그 첫 과정에서 바른 것을 고르도록 제시된 3개의 문제였다. 평소 이런 초보적인 문제에 헷갈릴 리가 전무하다. 그럼에도 뭔가 씌였던가. J여사가 고른 답은 아래 고딕체로 표시한 것과 같았다.


단오날 : 단옷날”, “희노애락 : 희로애락”, “생각건대 : 생각컨대”


위 문제 중의 첫 번째에서 “단오날”이라고 선택했다. 절대로 “사이시옷” 쓰임새를 제대로 꿰뚫지 못할 리 없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렇게 답했다. 내 일 이상으로 애통했다. 왜냐하면 J여사 지식의 곳간에 차곡차곡 갈무리해 놓은 보따리를 풀지도 않은 상태에서 순간적인 착각으로 나동그라져 추락한 모양새 같아 억울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도전은 거기에서 멈추며 아쉽게도 달인 도전에 실패했다.


글동무로 만난 지 열아홉 해째가 되나보다. 그동안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이나 행동을 보였던 적이 없으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만큼 완벽한 모습의 단아한 자태를 일관되게 보여 왔다. 부군은 은행에서 고위직으로 재임하다 퇴임했고, 큰 아드님 부부에게는 손자가 하나 있으며 부부 교사로서 결혼식에서 내가 주례를 맡았었다. 한편 작은 아드님은 제대하지 않았다면 중견 장교로 근무할 게다. 아울러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지금까지 각종 백일장 등에서 수상했던 상장이나 상패가 물경 60여개에 이를 정도로 글머리가 뛰어났다.


조물주의 천려일실이었을까.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J여사의 건강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던가 보다. 그래서 부군이 퇴직하면서 미련 없이 서울을 떠나 산 좋고 물 좋은 춘천 외곽으로 이주했다. 한편 J여사와 부군의 금슬이 남다른 것으로 짐작된다. 춘천으로 이사를 한 뒤에 내외가 함께 남해안 쪽을 겨냥해 여행길에 나섰다가 일부러 마산에 들러 내게 밥을 사기도 했었다. 그 뿐이 아니다. 그동안 내외가 함께 10 차례에 걸쳐 20여 나라 여행을 했다는 전언이다. 그 여행담의 일부가 “집 나가면 개고생? Oh, no!”라는 수필집이다. 이 외에도 “엿을 사는 재미”, “발가벗고 춤추마”, “연필 이야기” 등의 수필집을 펴낸 중견 수필가이다. ‘우리말 겨루기’에서 보여줬던 신선하고 아름다운 도전을 끊임없이 지속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간원하며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 우리말 겨루기 : KBS1에서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40분부터 방영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J여사가 출연한 방송은 제861회, 2021년 5월 24일 방영됨).


2021년 5월 27일 목요일
 

댓글목록

장은초님의 댓글

장은초 작성일

어머나 선생님, 이렇게 과분한 밥상을  차려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도 한번 도전해 보심이 어떨는지요?
실력은 차고 넘쳐도 순발력이 좀 딸리시겠지만요.

방송 출연은 참 좋은 추억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상금도 공돈 같아 뿌듯했고요.
곧 세상에 데뷔할 손녀딸 출산준비물에 쓰라고 뭉텅 떼어주고
작은놈도 좀 주고 남편도 좀 주고  했어요.
돈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군요 ㅎㅎ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몇 해전에 문우가 저에게 시를 한 편 써 주던데
오늘은 존경하는 선생님께 수필 한 편을 선물로 주셨으니
저보다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선생님 건강 잘 챙기십시오 감사합니다.

김재형님의 댓글

김재형 작성일

"우리말 겨루기와 J여사" 글에 푹 빠저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김사합니다.
늘 강녕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그러고 보니 교수님과 장 여사님과의 인연도 보통이 아닙니다.^*^
정말 안타까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장 여사님 대단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이상범 선생님이 여류 문인들께 책 사인을 할 때면
예컨대 [장은초 여사님], 이렇게 씁니다.
처음에는 '장은초 수필가님'이라고 쓰면 좋을 텐데 하였는데
이상범 선생님이 쓰는 '여사'는 결혼한 여자를 이르는 '女史'가 아니라
"여사(女士 _학덕이 높고 어진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였습니다.^*^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단오날-단옷날, 단오날을 선택했을 때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교수님의 사랑이 담쁙 담긴 글을 보는 내내 흐뭇하게 웃었습니다.
저희를 오래오래 그렇게 사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임영숙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