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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언제 이리도 어엿하게 성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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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3건 조회 33회 작성일 21-07-13 08:41

본문

언제 이리도 어엿하게 성장했을까


자정을 넘긴 시각 막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손주 유진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할아버지 전등을 켭니다!”했다. 잠옷을 찾으러 온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라면서 눈이 부셔서 이불을 끌어다 뒤집어썼다. 그런데 옷을 찾는 대신 침대 머리로 다가오더니 조용히 운을 뗐다. “할아버지! 지금 할머니가 체해 토하고 있으니 가보세요!”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조금 전까지 거실 소파에 앉은 채 혼곤히 잠에 취해 비몽사몽의 꿈길을 헤매고 있었다. 흔들어 깨워 방으로 들어가라고 이른 후에 내방으로 왔는데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서로 다른 방으로 향하면서 “내일 아침 유진이 7시에 깨워 외출 준비하고 예약한 치과 진료를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서야 한다.”는 얘기까지 덧붙였었다.


놀라 한걸음에 안방으로 달려갔다. 아내는 화장실에서 토하고 있었다. 문을 잠갔기 때문에 하염없이 서성이며 잠자코 지켜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일다경(一茶頃)쯤 지나서 밖으로 나왔다.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다. 저녁을 먹고 잔뜩 웅크리고 앉아 수(繡)를 놓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소파에서 깜빡 잠이 드는 과정에서 재수 없이 급하게 체한 것 같다는 얘기였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나와 헤어져 방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심하게 어지럽고 울렁거리더란다. 서둘러 소화제와 활명수를 찾아 먹었음에도 진정되지 않아 토했단다. 두세 차례 토한 뒤에 다시 약을 먹고 나서 나와 유진이가 번갈아가면서 등을 두들겨 주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그 이후 밤이 새도록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옆에 누운 아내의 기색을 살펴도 크게 괴로워하거나 화장실을 들락거리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유진이가 말했다. 오늘 밤엔 할머니 옆을 지키며 보살피라면서 제 베개와 이불을 들고 원래의 자기 방에서 잘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조금 뒤에 내 이불과 베개를 들고 와서 평소 자신이 자던 자리에 놓고 나갔다. 아이의 숨겨진 속내를 정확히 헤아릴 재간이 없어 무척 궁금했다. 그렇다고 늦은 시각에 쫓아가서 미주알고주알 캐볼 계제도 아니었다. 좀이 쑤셨지만 내일 아침 조용히 물어보기로 작정했다. 어쩌면 자기가 할머니 시중을 드는 쪽보다 내가 더 살뜰하게 보살펴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기특하기도 하고 어른스러운 행동이 무척 미덥고 뿌듯했다. 비록 우리 내외를 위에서 내려다 볼 만큼 훌쩍 자랐을지라도 모든 면에서 아직은 어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른을 한 수 가르쳐 줄 정도로 꽉 찬 멀쩡한 생각과 칠칠하고 올곧은 행동은 무엇을 함축할까.


지금의 집으로 이사 와서 곧바로 유진이 잠자는 방을 따로 배정했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이전에 살던 집까지는 우리 내외와 같은 방을 사용해왔다. 그런 습관에 길들여진 까닭이었을까. 제방에 혼자 자는 게 내키지 않았던지 툭하면 밤중에 이불과 베개를 들고 우리 부부 사이로 파고들어 잠들었던 게 부지기수이다. 그 같은 행동을 지속해 지난해 늦봄부터는 아예 제 할머니와 함께 자도록 했다. 그 대신에 내가 유진이 방에서 자고 있다. 그런 까닭에 녀석이 우리 내외가 딴 방을 쓰도록 생이별을 시킨 원흉인 셈이다. 은근슬쩍 간을 보기도 한다. “언제 네 방으로 돌아갈 것이냐”고. 그러면 느물대며 “앞으로 2~3년 뒤”라고 대답한다. 그럴지라도 눈치를 준다거나 미울 리 없다. 그를 핑계로 나 혼자 오붓하고 안락한 잠자리를 은근히 즐길 수 있지 않은가.

 

느긋한 토요일인데도 아침 일찍 깨웠다. 예약된 치과 진료를 마치고 곧바로 학원에 보내야하기 때문에 서둘러 채비를 마친 뒤에 뭐라도 간단히 요기(療飢)라도 시켜야 했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고 바나나와 우유 따위를 대령할 때였다. 어제 밤 평소처럼 할머니 옆에서 자지 않고 나와 잠자리를 바꿨는지 물었다. 그 이면엔 명확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는 체해서 토하는 과정서 경험했던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유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고열로 신음하다가 잠자리에서 급히 토했던 적이 있다. 손쓸 겨를이 없이 벼락 치듯이 이불과 방바닥에 심하게 토했을 때 할아버지인 내가 맨손으로 쓸어 담으며 치우던 끔찍한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단다. 그런데 자신은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럴 경우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는 내가 할머니 옆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얘기였다. 다른 하나는 위급한 돌발 사태가 발생할 경우 맹탕인 자기보다는 다양한 체험을 한 어른이 훨씬 효과적으로 대처하리라는 판단에서 취한 행동이었다는 실토였다. 덩치만 산처럼 컸지 생각은 구상유취(口尙乳臭)하다고 여겼던 선입견을 일거에 불식시켰다. 그렇게 꽉 찬 행동에 많은 생각을 거듭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언제 저리도 어른스럽게 성장했는지 신통방통했다. 이제 겨우 중학교 2학년일 뿐인데.


자신의 배가 고프면 함께 자리한 식구들의 눈치 보지 않고 허겁지겁 먹어대는 자기중심적인 버릇을 비롯해 김치찌개에서 돼지고기만 골라 먹는 행동이 마뜩찮아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외출 시에 툭하면 슬리퍼를 신고 나서는 따위가 눈에 거슬려 말참견을 하기도 한다. 이런 지적이나 간섭이 예순 둘이라는 나이 차이에서 어쩔 도리 없이 생기는 조손의 세대차 현상으로서 ‘꼰대’짓은 아닐까. 그렇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분명 내 기대를 훨씬 압도하는 어엿한 도령으로 우뚝 성장한 모습이 오늘 따라 듬직해 흐뭇하기만 하다.


2021년 6월 19일 토요일
 

댓글목록

김재형님의 댓글

김재형 작성일

어였하게 성장한 유진이 행동이 너무나
귀엽고 이제 중학생으로써 으젓하고
어른스런 생각과 행동에 기특함과 함께
앞으로의 유진이의 성장에 기대가 크시겠습니다.
귀여운 손녀의 바람직한 성장에 늘 즐거운 시간
이 겠습디.
유진이와 함께 온 가족이 즐거움 넘치는
매일이길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동진(同塵) 김 재 형 드림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유진이 이야기를 듣고 교수님 마음이 흐뭇하셨겠어요.
유진이가 키가 자라고 몸이 자랐으니 마음도 지혜도 잘 자랐음이 보입니다.'
그나저나 사모님이 무척 고생하셨겠어요. 지금은 괜찮으신거죠.

날씨도 무덥고 코로나도 기승을 부리고 정말 힘들고 어려운 여름입니다.
건강관리 잘 하십시오.

임영숙 올림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교수님, 유진이가 감동입니다.
그런 유진이가 있어서
교수님의 여생도 행복하실 거 같습니다.

사모님께 늘 건강하시라고 말씀 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