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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버지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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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1건 조회 853회 작성일 21-07-17 19:07

본문

아버지를 생각하다

윤복순

 

막 출근을 했다. 주변에 병원이 없어 아침운동을 하고 좀 늦게 나온다. 컴퓨터를 켜고 명찰을 걸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서울 동생이다. 마침 치과처방전을 들고 아저씨가 들어온다.

전화를 끊고 조제실로 갔다. 동생이 종종 전화를 하지만 이 시간은 아니다. 점심식사 후 무료한 때나 일이 잘 되지 않을 때 언니 뭐 재밌는 것 없어?” 하며 전화를 한다. 조제를 하면서도 무슨 일 있나, 이렇게 일찍... 아픈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저씨는 가고 불안한 마음에 얼른 전화를 눌렀다. 동생은 5~6년 전 위암 초기 수술을 받았다. 훨씬 전에는 수련의 과정과 박사논문을 쓰면서 얼마나 애를 닳았는지 쓸개즙이 굳어 있어 떼어냈다. 나이를 먹어가니까 건강 말고는 크게 걱정할 것이 없는데. 하기야 건강보다 더 걱정인 게 또 있을까.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언니 나 상 받아.” 얼굴을 확 피며 축하! 축하! 축하를 외쳤다. 보건복지부장관상을 받는데 자랑할 것은 못되어 나한테만 알린다고 한다. “가문의 영광이다, 우리 소영이 교육부장관상 받은 이래로 두 번째네.” 돌아가면서 받는 건데 동생이 나이가 있다 보니 받는다고 한다. 나이 많아 받는 거면 나는 20년 전에 받았어야 하는데 보건복지부장관상은 고사하고 익산보건소장상도 못 받았다며 축하 많이 한다고 했다. “별 것 아니니까 소문 내지마, 우리 애들한테도 말 안 했어.”

 

아버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양자 왔다. 딸만 둘 있는 큰댁으로. 큰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큰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며 누나 둘과 같이 살았다. 누나들은 학교를 보냈는데 아버지는 보내지 않고 일을 시켰다. 아버지는 겨우 한글만 깨친 상태로 평생을 사셨다. 면사무소나 군청에서 무슨 서류를 떼실 때는 모르는 것이 많아 속이 상하고 창피해서 분통이 터졌다고 했다.

당신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자식들은 아들이든 딸이든 학교에 보냈다. 여덟 자식 중 여섯을 대학졸업 시켰다. 좋은 옷 한 벌 못 입으시고 지문이 닳아 주민등록증을 못 만드실 정도였다. 아버지의 피와 땀으로 나도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우리 리()에 박사 한 사람이 있었다. 동네에 살지도 않는데 2() 박사네 형, 박사네 조카, 박사네 큰집, 이렇게 부를 정도로 그 당시 시골에서 박사는 대단했다. 아버지도 당신 아들딸 중에 박사가 나오기를 겁나게 기대했다. 자식 욕심이 많고 교육열이 하늘을 찔렀다. 자식들 대학 보내느라 방앗간에 빚도 많았다. 등록금을 챙길 때면 술을 드셨고 우리 면()에서 나보다 자식 대학 많이 보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하며 힘든 것을 자랑으로 푸셨다. 박사 만들고 싶은 마음은 힘든 만큼 더 간절했다.

언니도 나도 대학 졸업하고 1~2년 만에 결혼을 했다. 애기 낳고 살림하고 박사 할 생각도 못했다. 딸들이 위고 아들들이 밑이다. 그리고 막내가 딸이다. 큰 남동생이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대 갔다 오고 빚 얻어서 치과개원하고 결혼하고 빚 갚고 시간이 걸렸다. 대학원을 다니고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는 아버지가 많이 연로하셨다. 그리고 치매가 왔다.

우리나라에 박사들이 많아지면서 희소가치도 떨어졌다. 고등학생의 70~80% 가 대학진학을 하니 아버지의 자식들 대학 보낸 자랑도 시들해졌다.

아버지는 치매로 최근 것은 기억을 못하면서 방앗간에서 쌀 빚 얻던 시절은 기억을 해 내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아랫동네 O박사 얘기를 할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들 줄줄이 대학 보낼 때 어느 해는 대학생이 네 명이었는데 그 힘든 때가 제일 좋았고 정말 박사가 부러웠었나 보다.

 

월요일, 익산의 주간신문인 OO신문이 왔다. 나는 그 신문에 10년 넘게 한 달에 한 편씩 수필을 쓴다. 시정에 관심은 없지만 그 신문을 대충 훑어는 본다. 한 페이지 아래쪽에 동생이 보건복지부장관 표창장 받은 기사와 사진이 나와 있다. 12페이지 신문인데 한 면은 원광대학교, 원대병원, 원광 전문대 등 소식이 실린다. 동생이 원광대학교 산본의료원에 교수로 근무하니 원대 소식란에 실린 것이다. 다음 페이지 위쪽엔 내 글이 실려 있다.

2013년부터 질병관리청 혈액관리업무 심사평가단으로 활동해 오면서 전국 혈액원 (blood collection center, doner center)및 혈액의 집에서 질 높은 수준으로 혈액의 품질을 관리할 수 있도록 적극 힘써왔으며 국내 병원에 혈액수급 안정화에 크게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고 쓰여 있다.

, 너 상 받은 것 신문에 났어.”

그래! 그것 사진 찍어서 보내줘 봐.” 휴대폰이 없어서 못한다고 했다. 자매의 목소리는 어느새 동구 밖을 넘는다. 신문에까지 났으니 소문내도 되냐? 연말에 우리 집에서 친정 식구들 다 모이자. 너 우리 집안의 자존심을 세워줬으니까 내가 큰 상 차려줄게. “코로나19나 빨리 빨리 끝나라고 해, 내가 한 턱 쏠게.” 연말에는 2차 접종까지 끝나니 기대를 해 본다.

텔레파시가 통했을까. 장마로 포도밭에 피해 없냐는 작은 언니의 전화다. 막내 얘기를 하니 잘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자식들 중에 박사 나오길 하늘만큼이나 바라셨는데.” 2O박사를 많이 부러워했다며 옛날 얘기를 꺼낸다.

언니도 우리가 그 시골에서 그 시절에 대학물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잘 만난 덕분이고, 오늘 날 이렇게 잘 사는 것도 다 아버지 덕이라며 새록새록 고맙다고 한다. 언니도 나도 이제는 동생도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학교 다닐 땐 아버지가 농부라서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철이 들어 당신이 얼마나 대단하신지 고개가 숙여진다. 죄송하고 고맙고 아버지가 많이 생각나는 오늘이다.

다음에 친정식구들 모일 때 막내보고 박사학위증, 장관표창장 가지고 오라고 해서 다 같이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가자고 해야겠다.

 

2021.7.10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당신의 배움이 짧았던 한을 풀기 위해 온갖 고생 무릅쓰고 자식 여섯을 대학에 보내신 선생님의 선친을 우러러 봅니다. 게다가 생전에 간절히 원하셨던 박사 학위를 취득한 자식도 있으시니 하늘 나라에서 흐뭇하게 지켜볼 것입니다. 한결같이 자기 자리에서 사회에 봉사하며 삶을 누리시는 형제분들이 모이는 자리 무척 행복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