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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산책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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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3건 조회 38회 작성일 21-08-28 17:19

본문

산책길에서

윤복순

 

아침운동 대신 산책을 한다. 느릿느릿 걷는다. 느린 만큼 많은 것을 본다. 토끼모양의 쌍둥이 흰 구름이 싱긋이 웃는다. 어쩌다 오는 손자손녀는 만 다섯 살이 되었다. 따로 해도 되는데 둘이 나란히 서서 하나 둘 셋,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똑같이 맞춰서 인사하고 웃는다. 오늘 구름이 손자손녀 같다. 옆의 구름은 까불이 같이 살짝살짝 흩어진 모습이 장난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나도 따라 부른다.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서너 개...”

구름이 그리는 하늘이 보기 좋다. 햇살과 구름의 비율에 따라 양팔이 옆으로 벌려지기도 하고 위로 올라가기도 한다. 옅은 구름 사이로 태양이 떠오를 때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양팔을 올려 포효하듯 어느새 나도 그런 자세가 된다. 일출은 양팔을 벌려 맞이해야 할 것 같아서다.

구름이 짙고 옅게 흩어진 날 해가 구름 사이로 비칠 때면 햇살이 금빛 사선을 쫙쫙 긋는다. 나에게 큰 축복을 내려주는 것 같아 양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돈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하늘이 높아졌다. 흰 뭉게구름이 많아졌다. 하늘 올려다보는 재미가 좋다. 아침마다 누리는 행복이다.


더운 낮을 피해 새벽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밭에 나와 일을 한다. 참깨를 배어 깻단을 만들고 그 위에 비닐을 씌워 놨다. 새들이 쪼아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란다. 참깨를 배어낸 곳엔 들깨를 심는다. 땅 한 뼘도 놀리지 않는다. 그 마음을 아는 들깨가 하루가 다르게 푸르름을 더 한다. 내 농사도 아닌데 아침마다 이것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가 이럴 진데 주인들은 오죽할까. 이 맛이 그들을 건강하게 한다.

밭을 지나면서 세상간섭을 다한다. 고추를 빨리 따야겠다는 둥, 참깨를 배어야 되겠는데 어찌 이리 둘까, 혹 어르신이 아픈 것은 아닌가, 호박잎만 무성하지 호박은 하나도 안 열렸다는 둥, 고구마순은 붉은 것보다 푸른색 나는 것이 맛있는 것인데 이것은 정말 맛있을 것 같다는 둥, 이 옥수수는 진짜 토종인 것 같다는 둥, 땅콩 다 캐면 이삭이나 주어볼까, 어렸을 때 들은 기억, 살아오면서 터득한 것들을 총 망라해 간섭을 하며 지나다닌다.

할아버지가 약국에 오면 항상 할머니 약을 샀고 할머니가 아프다고 걱정을 했다. 많이 아파 바깥출입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아침에 두 분이서 고추를 딴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약국에 오셨지만 두 분이 부부인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내 보기엔 할아버지가 더 아프신 것 같다. 할머니는 주름도 없고 목소리에 힘이 있다.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피골이상접이고 허리도 굽어 힘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항상 할머니 걱정만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밭엔 고추, 옥수수, 들깨, 참깨, 땅콩, 생강, 도라지, 고구마, 상추, 가지 정말 없는 것이 없다. 아들딸에게 보내주는 재미로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일 것이다.

 

할머니가 큰 통에 물을 흘리면서 무언가를 씻고 있다. 궁금해서 가보니 빨간 고추다. 고추를 씻어서 말리는 줄 몰랐다. 친정에선 고추를 따면 좋은 것을 골라 아랫목에 널고 여름인데도 방에 불을 땠다. 하루 밤 방에서 익혀 다음날 마당에 멍석을 펴고 말렸다. 고추 따는 날은 마루에서 잤다. 할머니는 두 번 씻어서 건조기에서 말린단다.

제일 크고 싱싱한 것 두 개를 주셨다. 예뻐서 꼭지를 실로 묶어 걸어 놓았다. 사진도 찍었다. 태양초 만들기가 쉽지 않다기에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베란다 빨래 너는 곳에 겹치지 않게 걸었다. 잘 넌다고 널어도 시간이 지나면 붙어있어 바지걸이 양쪽에 하나씩 물려 걸었다.

할머니가 들깨 모판에 물을 주고 있을 때 그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이 우리는 김제 처녀들인데 아주머니는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김제 공덕면 이란다. 나는 백구면, 성은 봉남면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제처녀들이 되었다. 할머니가 마당에 나와 계시지 않으면 성은 공덕떡(공덕댁)” 하고 부른다. 방안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웃음과 같이 ~” 소리가 나온다. “우리 지나가요.” 이렇게라도 인사를 나눠야 마음이 놓인다. 가끔은 대답이 없는데 이런 날은 할머니의 자가용인 자전거가 보이지 않는다. 논에 가신 것이다.

2~3년 전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셔 혼자 사신다. 밭이 넓어 팔려고 내놨는데 입구에 아주 조금 남의 땅이 있다. 거의 거래가 성사되었는데 남의 땅 주인이 두 배를 요구해 무산되었단다. 그야말로 알박기다. 농약도 줘야하고 그 넓은 밭을 팔순의 할머니 혼자서 가꾸기에는 힘에 부친다. 어서 팔렸으면 좋겠다.

 

들판의 색깔이 하늘만큼 예쁘다. 녹색향연이다. 벼농사는 대풍인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박수가 쳐진다. 논 옆의 하천에 물이 많아졌다. 논에 물을 대는 날인가 보다. 논 입구는 가물어서 논바닥이 쩍쩍 갈라져 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다. 농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논에 물이 가득 차 있어야 벼가 잘 자라는 줄 알지만 물이 항상 차 있으면 벼가 부실해서 작은 태풍에도 넘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가끔씩 물을 빼고 논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자식들을 키울 때도 부족함이 없이 과잉보호를 하면 온실 속의 화초가 되어 조그만 어려움도 이겨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보다.

논고랑에 우렁이가 많다. 부화한지 얼마 안 되는지 새끼손톱만 하다. 우렁이는 자기 몸 안에 40~100개의 알을 낳고 그 알이 부화하면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파먹고 산다고 한다. 어미는 한 점의 살도 남김없이 새끼들에게 주고 빈껍데기로 둥둥 떠내려간다. 새끼들은 그것을 보고 우리 엄마 시집가네.”라고 한단다. 빈껍데기는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벌써 떠내려간 것 같다. 어찌 우렁이만 그럴까, 나도 어머니의 속살을 파먹고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을까.

가물치는 수천 개의 알을 낳은 후 바로 실명하게 되고 먹이를 찾을 수 없어 지쳐 갈 때, 알에서 부화되어 나온 새끼들이 어미가 굶어죽지 않도록 자진해서 한 마리씩 어미의 입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어미가 다시 눈을 뜰 때쯤이면 남은 새끼는 10%도 되지 못한다. 가물치를 효자 생선이라 부른다.

성이랑 우렁이와 가물치 얘기를 나누며 하천 길을 걷는다. 매일 소나기가 온다고 하는데 이곳은 몹시 가물다. 그 날은 논에 물을 댄 다음 날이었을 것이다. 하천에서 갑자기 물고기 하나가 툭 뛰어 올랐다. 성도 나도 분명히 보았다. 순간 함성을 질렀다. 물속을 보니 작은 물고기들도 왔다갔다 신이 났다. 그 수가 많다. 뛰어 오른 물고기가 가물치였을 거라 믿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가물치의 효심을 칭찬했더니 이런 멋진 쇼를 보여준 것 같다. 날마다 가물치를 불러보지만 쇼는 한 번으로 끝이다.

하늘의 구름과 들판의 녹색잔치, 우렁이와 가물치의 공연까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인정과 살아가는 모습, 날마다 아침산책길에서 만나는 즐거움이다.

 

2021.8.20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잊고 지내던 친구 하나를 소환하여 생각했습니다.

대학 시절 친한 친구 하나가 "김제군 백구면 영상리"의 부잣집 맏아들이었습니다. 친구네 집에 몇이 어울려 놀러도 갔었지요. 대학 졸업하고 그 친구가 서울에서 직장을 다녔지만 어쩌다가 소식이 두절된 상태로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그렇게 멀어져 잊고 지냈는데 선생님의 글을 통해 그 친구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또 하나 가물치에 대해 잘 배웠습니다.

""가물치는 수천 개의 알을 낳은 후 바로 실명하게 되고 먹이를 찾을 수 없어 지쳐 갈 때, 알에서 부화되어 나온 새끼들이 어미가 굶어죽지 않도록 자진해서 한 마리씩 어미의 입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어미가 다시 눈을 뜰 때쯤이면 남은 새끼는 10%도 되지 못한다. 가물치를 “효자 생선”이라 부른다.""

좋은 글 고맙게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선생님, 늘 고맙습니다.
글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은
가장 열심히 쓰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믿습니다.

윤복순님의 댓글

윤복순 작성일

역시 태양초 만들기는 쉽지 않네요.
고추를 가져오고 바로 가을장마가 시작됐어요.
양글양글하고 고추를 흔들 때마다 고추씨 소리가 사그락사그락 날 것을 기대했는데,
쪼글쪼글한데다 검은 점 흰점이 생겼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