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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전라도 사람들의 놀라운 어휘 구사력 9, 전라도 사람들이 부엌을 정재라고 부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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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드림출판사 댓글 2건 조회 1,088회 작성일 21-09-1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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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아버지가 과음을 한 탓인지 일어날 기척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 어디론가 일을 하러 가셨을 것이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솥에 물을 몇 바가지 붓고는 불을 뗐다. 솥뚜껑 틈새로 김이 새어 나올 즈음, 큼직한 커피 봉지를 뜯어 끓는 물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기다란 나무 주걱으로 휘휘 저었다.

검붉은 커피 색깔은 그럴 듯하였다. 커피를 한 대접 떠서 아버지께 드렸을 때의 표정이라니.

TV가 없던 시절은 이제 전설이 되어 버렸지 싶다. 초등학교 3~4학년 즈음이었을까. 친구 큰형님은 파병 장병으로 월남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제대를 하면서 여러 식품을 가지고 와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때 나는 커피를 처음 알았고, 부엌에서 커피를 한 솥단지 끓여 커피 맛을 본 것이다.

 

커피 한 솥을 끓여내던 시골집 부엌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솥단지, 아궁이, 부뚜막, 조리, 초병, 행주, 부지깽이, 불당그래, 선반, 땔나무, 석유곤로

부뚜막신()’이라는 말에서도 읽힐 수 있듯이, 어느 집이든 시골집 부엌은 가장 신성한 곳이었다. 가족의 생명을 유지하고 살리고 건강케 하는 모든 일은 부엌에서 비롯되었다.

부뚜막장단을 맞추며 때론 흥얼거리기도 하셨겠지만, 불을 때 밥을 짓는 부엌에서, 어머니는 불땀 좋은 아궁이를 바라보며 근심 걱정 등 모든 사유와 고뇌를 풀어놓았을 것이다. 아궁이 속 잉걸불의 홧홧한 불기 앞에서 자식들이며, 친청 식구들도 떠올리셨을 공간이다.

더구나 부엌, 특히 부뚜막은 항상 깨끗하고 정갈해야 하는 곳이었다. 내 어릴 때 어머니는 부뚜막에다 뭔가 음식을 차려놓기도 하고, 안방으로 들어올 수 없는 제사는 부뚜막에서 모시기도 하였다. 또한 행주질이 멈추지 않는 곳이 부뚜막이었다.

 

다른 지역은 모르겠는데 전라도 사람들은 부엌을 정재라고 불렀다. 대부분 정재는 나무로 짠 정잿문이 달려있었다. 사람이 없을 때면, 정잿문은 굳게 닫아두었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나, 마실 나갔다 왔을 때 정잿문이 열려 있으면 푸근하면서도 궁금증이 잃었다. 그곳에는 필히 어머니가 있을 것이고, 또 무언가 준비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왜 정재였을까.

정재(淨齋)는 절에서 밥을 짓는 곳이라 한다. 부엌을 정재로 부른 까닭은, 신앙적 색채가 깃들었을 만큼 신성한 곳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쌀을 씻고 안치고, 다 된 밥을 가족을 위해 각자 그릇에 담으며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렸을 것이다. 또한 그릇을 씻고 닦으며 자신의 고뇌와 번민도 그리 씻고 닦아내지 않았을까.

전라도에서는 행주 또한 행지포(), 행기포()라 불렀는데 나는 행지포에 더 무게를 둔다. 왜냐하면 행지(行持)는 불교에서 불도를 닦아 지님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지포는 단순히 그릇을 씻고 닦는 헝겊이 아니라 도를 닦는 헝겊인 것이다. 결국 행주질이란 수행의 길인 셈이다.

부뚜막이라는 말도 예사롭지 않다.

부뚜막의 옛말이 붓두막이다. ‘붓두부뚜는 표기상의 차이일 뿐 발음은 같다. 붓두’, 어쩐지 붓다에서 나왔을 거 같지 않은가.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정재(淨齋)'라는 표현과 행지포(行持)가 함축하고 있는 불교적인 의미를 오늘 처음 알았네요. 그러고 보면 우리말의 어원도 제대로 모르고 이제까지 살아온게 신기하지요! 좋은 내용 고맙습니다.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교수님,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낱말 공부를 하다 보니 그리 추측하게 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