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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선만 떨었던 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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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2건 조회 1,048회 작성일 21-09-2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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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만 떨었던 벌초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걸렀던 벌초를 다녀왔다. 말이 벌초길일 뿐 풀 한 포기 깎지 않아 멋쩍은 마음을 금할 길 없다. 꼭두새벽에 기상해 채비를 하고 나선 길이었는데 체면이 말씀이 아니었다. 딴에는 잔뜩 수선을 떨며 서둘러 달려갔건만 애통하게도 선영(先塋)에 도착했을 때 벌초를 끝내고 아침을 거른 일행들이 새참 비슷한 점심까지 먹은 후에 우리 내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 지각했던 것처럼 진정한 마음을 올곧게 전하고파서 중언부언했다. 그런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배고플 것이라며 한사코 식사를 차려줬다. 어색한 속내를 곧이곧대로 들키지 않고 숨기려는 표정관리가 무척 힘들었다. 지나친 변명은 되레 결례라는 생각에서 적당한 선에서 말을 삼가하고 건성으로 밥을 퍼먹는 시늉을 하다가 슬쩍 숟갈을 내려놨다.


지난해엔 코로나19 때문에 선조들의 시제(時祭)를 봉행하는 제단 주위를 비롯해 증조까지의 묘소는 고향에 뿌리내린 몇몇이 십시일반의 심정에서 작은 모듬으로 나뉘어 시차를 두고 벌초를 했었다. 한편 우리 대(代)를 기준으로 할 때  조부모와 부모의 묘역은 각각 직계 자손별로 했다. 그런데 지난해 사촌들이 내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동생들 두셋이 모두 벌초할 터이니 형은 참석하지 말라고. 짐짓 미안한 척하며 은근슬쩍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지난해 벌초는 슬그머니 빠졌다. 그렇게 벌초를 거르는 게 달콤하다고 생각했으나 지난 한 해 동안 께름칙해 혼났다.


올해도 역시 지켜야할 사회적 거리두기와 방역 규칙을 무시할 수 없어 지난해 판박이 방법으로 벌초를 한다고 했다. 사촌에게 벌초날짜를 물었더니 오늘(9월 12일)로서 알아서 할 터이니 무조건 오지 말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올해까지 벌초에 빠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 기필코 참석하기로 했다. 단단히 벼르고 새벽 인정(寅正 : 4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6시에 아파트 정문을 나섰다. 기상 시간에 비하면 너무 늦게 출발했지만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새벽 시간에 통행 차량이 적은 관계로 적당히 과속하면 이른 시각에 너끈하게 도착하리라고.


월영동의 아파트를 나서 내서(內西) 나들목에서 구마고속도로 진입해 달리다가 현풍(玄風)에 이르러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접어 들어 김천에서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으로 길머리를 틀어 달렸다. 그러다가 옥천(沃川) 나들목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선영에 이르렀다. 몇 년 만에 달리는 고속도로엔 불과 몇 km마다 시속 100km를 초과하는 과속을 감시하는 고정 카메라가 즐비하게 깔려 있어 도저히 과속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고속도로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훤히 꿰고 있는 사람 이외엔 시속 100km 이상의 속도로 달릴 재간이 없어 예상외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게다가 운전을 하는 아내 건강을 고려해 휴게소에 들려 충분히 휴식토록 배려하는 시간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선영을 찾아 가는 도중에 팔순 중반에 이른 작은 누님을 뵙기도 했고, 불혹(不惑) 중반의 조카를 저 세상으로 보낸 재종(再從) 집에 들러 때늦은 문상을 했던 때문에 마냥 늦어질 수밖에 도리가 없었지 싶었다. 벌초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은 다른 노정을 택했다. 금산(錦山) 나들목에서 대진고속도로 하행선으로 접어들어 진주에서 남해안고속도로 부산 쪽으로 진입해 달렸다. 그러다가 진성(晋城) 나들목을 빠져나와 국도로 마산에 도착했다. 그런데 귀가 길에 지나왔던 고속도로에는 시속 100km를 넘는 과속을 감시하는 고정 카메라가 경부고속도로에 비해 훨씬 적었다.


청주한가 공안공(恭安公) 할아버지의 후손이다. 내 조부(32대손)는 3형제였는데 그분들의 슬하에는 모두 8명의 아들(33대손)을 두셨다. 그리고 8명의 33대손에게서 태어난 16명의 아들이 현재 우리(34대손)이다. 이들 중 참여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절반쯤은 자연스럽게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7~8명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게 부담스러워 절반가량은 어제(토요일) 각자의 조부모와 부모의 묘를 찾아 벌초를 마쳤다. 그렇게 하고도 남아있던 묘는 오늘 새벽 동이 틀 무렵부터 서둘렀기 때문에 내가 도착한 오전 10시 조금 지난 시각엔 이미 벌초가 완료되었단다. 단단히 벼르고 새벽 4시에 기상해 불원천리 달려갔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 아침과 점심을 겸한 새참 같은 밥만을 얻어먹은 꼴이었다. 그 뒤에 공직에서 은퇴하고 고향 마을로 귀촌한 재종의 집 앞 느티나무 아래서 한담을 나누다가 길을 재촉해 마산으로 돌아온 시각은 벌건 대낮인 오후 3시 조금 지났었다.


천역(天疫) 같은 괴질의 두려움이 이유일까. 고속도로를 오가는 차량들이 현격하게 줄어들면서 휴게소도 한산하다 못해 쓸쓸했다. 지난날 오늘 같은 벌초 철이면 이른 아침이라도 나들이객으로 북적댔는데 여기저기 띄엄띄엄 몇몇이 눈에 띌 뿐이었다. 선영을 찾아가며 들렀던 성주휴게소와 옥천휴게소에는 이른 아침이라 해도 찾는 이가 거의 없어 괴기 적적했다는 표현이 합당하다고 느낄 지경이었다. 한편 귀로에서 잠시 머물렀던 덕유산휴게소와 산청휴게소는 한낮임에도 나들이객 수는 평소 1/3 수준쯤이었다. 늘 북적이던 휴게소에 이용객이 대폭적으로 줄어든 현장을 직접 목도하며 수많은 자영업자들의 절규를 실감할 것 같았다.


벌써 두 해째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다. 뜻하지 않은 괴질의 몽니가 자행되면서 누구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비대면(非對面) 온라인 언택트(untact) 시대의 서막이 활짝 열린 셈이다. 하지만 낯선 환경과 문화의 충격에 허둥대면서 익숙했던 대면(face to face) 사회로 환원을 염원하고 있다. 그리 복원되면 마음 편하게 후손들이 한데 모여 벌초도 제대로 하고 시제(時祭)를 모시며 선조들을 기릴 터인데. 도둑질 하듯이 몇몇이 살짝 만나 벼락 치듯이 선영을 찾아 벌초를 하고 돌아와도 아쉬움은 고질병 같은 체증(滯症)처럼 여전히 남아 불편하다.


2021년 9월 12일 일요일
 

댓글목록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벼락치기 벌초는 슬픈 일인데 글을 읽으며 웃음이 났어요.
언텍트 시대를 잘 견디고 좋은 세상이 어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교수님! 추석 잘 쇠셨으리라 믿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임영숙 올림

장은초님의 댓글

장은초 작성일

선생님 추석 잘 쇠셨는지요?
아직도 벌초하러 다니시는 선생님이시니 대단하십니다.
남편은 포항까지 가는 길이 힘든다고(퇴직해 시간이 넉넉하면서도)
잘 가지 않으려 합니다.
두 형님 믿고 무임승차 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대신 작년 한식 때 조상님들의 유택 전부를 재정비하는 일을 벌였는데
그때 총비용의 절반을 남편이 쾌척했습니다.
그렇게라도 마음이 편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돈으로 하는 효도가 제일 쉬운 효도라고 하는데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몸수고를 못하고 있는 저희가 참 부끄럽기만 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