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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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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1건 조회 742회 작성일 21-10-09 17:10

본문

아직은

윤복순

 

후배를 데리고 온다고 점심을 같이 하자는 남편의 전화다. 몇 십 년을 알고 지내니 나하고도 친하다. 식당예약을 할까하다 시간을 보니 약국에 도착해서 식당을 정해도 충분할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혼자 들어왔다. “OO가 여자 친군지 누굴 하나 데리고 왔네.” 목소리가 건조하다.

그는 남편이 가장 많이 만나고 마음으로 제일 아끼는 후배다. 남편이 직장 생활하는 동안 주말부부를 많이 했다. 그때 그들 부부가 많이 도와주었다. 남편이 그에게 보직을 두어 번 물려줬을 것이다.

퇴직 후, 1시간여 거리에 살기에 자주 만나 여행도 여러 번 했다. 나는 시간이 어중간할 때면 빨리 그들에게 약속 있는지 물어 바로 시간을 잡았다. 그들이 사는 근교를 같이 걷고 저녁을 먹고 늦은 기차를 타고 오곤 했다.

오늘도 남편이 포도 갖다 먹으라고 포도밭으로 부른 것이다. 올해는 포도밭이 반으로 줄은 데다 수확 철에 비가 자주 내려 흉년이다. 출하 끝나고 많은 사람들을 불렀는데 올해는 코로나19도 있지만 물량이 적어 친정 식구들도 부르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부른 것이다.

 

작년 6월 그에게서 집사람이 갔어요.” 라는 전화를 받았다. 심장이 멈추고 온몸이 굳는다는 말은 이런 때 쓸까. 맥이 풀려 푹 주저앉아 한참을 우두커니 있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한데, 어떻게 한데무의식중에 그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팬데믹으로 발이 묶여있을 때라서, 아니 아무런 경황이 없어 형님에게도 알리지 못했다고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옛말에 상처가 망처라 했는데 그가 어떻게 살아갈지 답이 없어 보였다.

같이 여행할 때 그녀가 핸드백에 통장을 모두 넣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어떤 때는 아무 연관이 없는 돈 얘기를 할 때도 있었다. 그녀 아들이 약대를 졸업하고 다시 의대에 들어가 학비가 많이 들어가서 그럴 거라고 혼자서 지레짐작을 했다. 그때 이미 치매가 시작된 것이었을까. 그 뒤로는 아무런 낌새도 눈치 채지 못했다.

1년 쯤 뒤였을 것이다. 그녀가 전주에 무슨 브랜드의 아파트가 처음 생기는데 그곳에 투자하면 어떻겠냐고 전화가 왔다. 나는 그런 아파트가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동산투자 까지 나와 나눌 사이는 아니었다. 야무져서 자식들만 잘 키운 게 아니라 재테크도 똑 소리 나게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년 쯤 뒤, 포도밭에서 만났을 때 우리 아저씨 어디 갔어요?” 하고 물어 나를 놀라게 했다. 남자들 끼리 포도를 따고 그녀와 나는 그들이 가져갈 포도를 손질하고 있었다. 왠지 안절부절 하며 자꾸만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 치매? 내 입을 툭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이 가고 남편에게 얘기하니 후배가 걱정을 하며 치료받고 있다고 했단다. 나이 육십 초반에 치매라니 말이 되는가. 이런 날벼락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시어머니가 치매여서 요양병원에 계시지만 시모는 나이가 많으니까 그러려니 받아들이지만 그녀는 정말 이건 아니었다.

그 다음해 포도밭에 왔을 때, 차에서 내리는데 그녀가 몰라보게 말랐고 할머니태가 났다. 눈물이 확 쏟아졌다. 얼른 표정을 바꿔 그녀를 끌어안으며 잘 왔다고 했다. 그녀가 얼마나 포도를 먹었는지 오줌을 쌌고 기저귀가 다 젖어 겉옷까지 척척했다. 후배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차에 타기 싫어하는 그녀를 억지로 태우고, 어찌 인사를 나눴는지도 모르게 휭 떠났다.

햇볕이 말할 수 없이 좋은 날이었다. 자식들을 다 결혼시키고 적잖은 연금으로 아무 걱정 없이 살 그녀와 나이듦에 대하여, 늙어가는 이야기, 손자들 얘기를 나누며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자 했던 계획은 유리조각 깨지듯 무참하게 부서지고 말았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도 견고하지 못했던가. 살얼음판 보다 더 아슬아슬한 곡예인가.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한치 앞도 보장 받지 못한단 말인가. 슬펐다. 아니 무서웠다.

그의 아들이 서울 빅5 병원에 근무해 그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진료 받고 지하철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오다 지하철역에서 그녀를 잃어버렸다. 시어머니도 집을 나가면 온 식구가 비상이 걸리고 조그만 시골에서도 밤 열두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후배는 혼자 낯선 서울바닥에서 얼마나 애가 탔을까. 8시간 만에 찾았다고 했다.

후배는 중증의 아내를 3년 이상 집에서 돌봤다. 치매는 다른 병과 달라 간병하기가 정말 힘이 든다. 시모는 참 얌전하셨는데도 치매가 오니 욕도 잘하고, 며느리에게 당신 반지를 가져갔다 돈을 훔쳐갔다는 둥 애면 소리를 자주 해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곤 했다. 눈 깜작 할 사이 집을 나가 경찰서와 지구대에 상습 가출자의 명단에 올랐었다. 식구들의 삶이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져 갔다. 그의 고생이 짐작 되었다.

 

후배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이미 49재도 끝난 뒤였다. 바로 달려갔어야 했는데 차일피일 미뤄졌다. 코로나19는 좀처럼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후배를 만나러 갔다.

그가 역으로 마중을 나왔다. 쑥 들어간 휑한 눈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혀를 깨물며 참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비 접촉시대에 남편이 그를 껴안았다. 그의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나 때문에 겨우 추스르던 아내 생각을 더 하게 될까봐 나는 가지 않고 남편만 보낼까 여러 번 생각을 하다 갔는데, 잘 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파트 뒷산을 걸었다. 남자들이 앞에 가고 나는 뒤를 따랐다. 무슨 말을 했는지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나도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점심 먹고는 들판을 걸었다. 느린 걸음은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그의 얼굴이 역에서 봤을 때보다는 밝아졌다.

저녁까지 먹고 늦은 기차를 탔다. “형수님 고맙습니다.” 나는 또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다독여줬다. 집에 들어가면 또 얼마나 많은 외로움이 밀려올까. 아내의 빈자리가 하늘만큼 클 텐데. 집에 돌아오는 내내 남편이나 나나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만날수록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탁구를 치러 다닌다고 했다. 어느 날은 딸네가 온다고 했다고 해서 딸네랑 점심 먹고 우리랑은 저녁을 같이 하자고 했다. 딸을 만난 때문인지 표정도 밝고 말수도 늘었다. 여름에 만났을 때는 매일 아침 뒷산을 오른다고 했다. 그래,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 한 여자를 데리고 왔다. 넷이서 점심을 먹었다. 그녀의 표정은 밝다. 어떤 관계이고 얼마나 가까운지는 모른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 친구 사귀기도 쉽지 않은데 이성 친구는 오죽할까. 그가 그 어려운 일을 시작한 것 같다. 잘 했다고 말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 아직은, 아직은 소리만 나온다.

 

2021.10.5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내년말쯤 정년퇴직하는  같은 과(科)에서  재직하던 후배 교수 하나가 있습니다. 아마도 15년전쯤에 단현(斷絃)의 아픔을 겪었지요. 그 사모님  병환이 깊을 때 함께 장례를 모실 묘지를 보고 다녔던 각별한 후베 교수지요. 금슬이 그렇게도 좋았던..... 혼자 사는 게 쓸쓸해 보여 누군가 마음 맞는 짝을 찾아 보라고 해도 아직도 외기러기로....  오죽하면 그 꼴이 안쓰러워 여자 제자들이 이런저런 인연의 상대를 여러 사람 소개해 줘도 코방귀도 뀌 지 않는 돌부처 같은 그가 늘 외로워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걸 생각하게 하지요. 참, 유명을 달리하신 사모님도 약사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