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드림출판사

차례를 모시고 심란한 마음에 > 자유창작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고객센터
상담시간 : 오전 09:00 ~ 오후: 05:30
(주말 및 공휴일 휴무)
02.2612-5552
FAX:02.2688.5568

b3fd9ab59d168c7d4b7f2025f8741ecc_1583557247_0788.jpg 

수필 차례를 모시고 심란한 마음에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판암 댓글 2건 조회 750회 작성일 22-11-01 07:46

본문

차례를 모시고 심란한 마음에



차례를 모시고 뒤숭숭한 마음을 달래고 싶어 산에 다녀오며 중대한 결심을 했다. 정성스레 차례를 모셨지만 마음은 편편치 않았다. 차례를 모시고 아침식사를 마친 뒤에 서둘러 집을 나선 시각이 사정(巳正)*이었다. 오가는 길은 평소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한적해 주위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사념에 몰입할 수 있어 금상첨화였다. 젊은 시절엔 제사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세월이 흐르면서 빈발하는 잡다한 문제를 마냥 외면할 계제가 아니었다. 이 따른 고민을 거듭 해오다가 이제는 더 미루며 미적거릴 수 없는 구석으로 몰려 옹색한 처지가 되었다.


외아들인 때문에 매년 맞는 부모님의 기제사(忌祭祀)를 비롯해 추석과 설날의 차례(茶禮) 준비는 몽땅 아내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다. 장(場)을 봐다가 제수(祭需)를 장만할 깜냥이 되면 아내와 역할 분담이라도 하련만 마음뿐이다. 그 쪽에는 맹탕이고 슬기롭게 대처할 주변머리가 못된다. 그래서 여태까지 살면서 제사 때가 되면 아내의 뜻에 반하지 않도록 그때그때 적당히 대처할 뿐이었다. 따라서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철저한 방관자이자 영원한 구경꾼일 따름이었다.


재작년(2020년) 정이월에 걸쳐서 입 • 퇴원을 반복하며 19일 동안 입원을 하면서 아내가 담낭(쓸개) 절제 수술을 받았다. 그 무렵 설을 맞았다. 도저히 제수를 장만할 건강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였다. 대응 방안이 없어 달랑 떡국 한 그릇 체례 상(床)에 올려놓는 불경죄를 저질렀던 전과(前科)가 있다. 그때 이런 사태가 다시 재발된다면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척했었다. 그러다가 뚜렷한 결론 없이 어물쩍 넘긴 채 오늘에 이르렀다.


젊은 날엔 구태여 제삿날 운운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아내가 알아서 장을 봐 오고 제수를 장만했다. 그런 때문에 다 만들어 놓은 제수를 제상(祭床)에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시이(棗栗柿梨), 어동육서(魚東肉西), 좌포우혜(左脯右醯), .....” 따위를 따져가며 진설(陳設)하고 제를 모시면 끝으로 아무것도 걱정거리가 없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아내의 건강이 염려된다. 겨우 고희의 중반 고개를 넘고 있는데 멀리 걷지도 못하고 무거운 짐을 손에 들고 옮기지도 못한다. 가까운 동네 병원을 간다든지 슈퍼에 장을 보러 갈 때도 승용차에 의지하는 딱한 형편이다. 그렇다고 운동을 게을리 하는 게 아니다. 어느덧 매주 너 댓 차례씩 수영을 해온지 30년을 훌쩍 넘었다. 그런 대처와 아내의 건강은 정비례하지 않는가 보다. 이런 답답한 현실에 처하여 매주 대 여섯 차례씩 등산하는 나와 건강을 반반씩 나눠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지만 부질없는 연민일지 모른다.


올해 들어 아내가 제사 준비를 위해 장을 봐오고 제수를 장만하는 걸 옆에서 건네다 보며 많은 생각을 거듭했다. 힘이 부쳐도 자기의 몫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가상할 따름이다. 그런 심사를 에둘러 나타내는 말이다. “물가가 너무 비싸서 제사 방법을 바꿔야지”라며 엉뚱하게 물가를 탓하며 자기의 본심을 에둘러 드려내는 게 더더욱 안쓰럽다. 게다가 어쩌다 보니 “어머니 제사, 추석, 아버지 제사” 등의 제사 셋이 불과 두 달 사이에 줄줄이 이어져 있어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어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번 추석엔 아내에게 웬 눈병이 발생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더욱 심란하게 했다.


두 아들이 있어도 앞으로 제사를 모실 형편이 아니다. 그런데다가 아내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제사 모시는 게 힘겨워 비틀거리는 걸 여자 형제들 즉 아내에겐 시누이들이 꿰뚫고 있었다. 그런 이유를 앞세워 아내와 한 편이 되어 나를 세뇌시키려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제사 방법을 확 바꾸자고” 말이다. 이런저런 기회가 닿을 때마다 직 • 간접적으로 종용했다. 그럼에도 묵묵부답으로 대응하자 급기야는 아내를 앞세워 관철시키려 줄기차게 밀어 붙이기도 했다. 철옹성 같은 내 옹고집을 움직이지 못했었다. 처음엔 무심한 척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어렵고 힘들어 쩔쩔매는 아내의 모습을 마냥 외면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고집을 과감하게 접고 변화를 택하는 게 시대적 소명에 순응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산길을 오가는 3시간 동안 곰곰이 곱씹어봤다. 선뜻 내키지는 않을지라도 아내의 짐을 덜어주고 합리적인 대응이 절실하다는 맥락에서 단안을 내리는 게 옳다는 판단을 했다. 전래의 관습을 따르고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경천동지할 혁명적인 개혁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어쩌면 인륜도덕이나 예법에 정면으로 반하는 우매한 결정일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다음 설부터 차례는 최근 성균관에서 권장하는 “차례상 표준안”에 준(準)하여 모시기로 하고, 양친의 기제사는 아버지 제삿날에 어머니 제사도 합쳐서 함께 모시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고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단단히 벼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서 아내와 마주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중대한 선언(?)을 했다. “내년부터 제사 방법을 확 바꾸자”고.


내 양친은 고향 땅 선영의 가족묘지 유택에 합장한 채 영면에 드셨다. 그런 때문에 함께 나들이하기에 무척 편하실 것이다. 얼마 후 다가오는 아버지 제사(음력 9월 11일)를 모시면서 내년부터 제사 방법을 바꿀 것이라고 고해드릴 예정이다. 그러므로 내년부터는 아버지 제삿날 두 분이 함께 손잡고 마산으로 쉬엄쉬엄 오시라고 사뢸 참이다. 전통적인 인륜도덕이나 예법(禮法)에 다소 어긋날지 모르지만 불가피한 현실을 참작하여 혜량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


* 사정(巳正) : 사시(巳時)의 한 가운데. 오전 열 시를 이른다.


수필과 비평, 2022년 11월호(통권 253호), 2022년 11월 1일

(2022년 9월 10일 일요일(추석날))


댓글목록

박래여님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선생님, 찬성입니다. 바꿔야 해요. 여자들 너무 힘들어요. 아마 기독교 신자가 는 것도 제사 영향이 있을 겁니다.
신주 모셔놓고 평소 부모님이 좋아하던 것 한 가지 올리고 절해도 되지 않을까요? 제사 음식 안 먹는 자식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제사도 우리 대에 끝날 것 같다고들 하더군요.
요즘 명절 제사는 산소에 가서 간단하게 마른 육포와 술 한잔 치고 절 올리는 집이 많다고 들었어요.

김춘봉님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한교수님, 그리고 박래여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며칠 전, 세계 최초 서재형 안치단과 서적 형태의 유품함을 갖추고 있다는
<분당 봉안당홈> 관계자와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부모님 묘소가 있는 안양과 가까운 곳입니다.
나와 집사람 몫으로 분양을 생각 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