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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장백산 코스, 백두산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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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춘봉 댓글 2건 조회 804회 작성일 22-11-14 19:26

본문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나와 관련이 있는 <빛바랜 사진> 3장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굴곡진 가족사> 자소서를 완성했습니다.

자소서를 끝낸 다음, 자전적 소설도 집필 중에 있습니다.

자전적 소설을 쓰려면 현재의 기억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면에 잠자고 있는 기억을 자극하는 데 필요한 현지답사가 절실합니다.

그런데 1951년 6.25 전쟁으로 남하한 삼팔따라지 신세라서 난감했습니다.

나는 1941년 신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현지답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압록강 건너 먼발치에서라도 고향산천 신의주를 바라보고 싶었지만, 냉전체제의 북한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국 관광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국제 정세는 유동적이라서,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졌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한국과 중국 수교로, 백두산 관광이 가능해졌습니다.

나는 201587일부터 12일까지 56일 여행사 패키지로 백두산을 다녀왔습니다.

압록강 건너 신의주도 먼 발치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을 이륙한 아시아나 여객기가 대련에 도착한 다음 버스로 '단동', '환인', '백두산', '집안', 다시 '단동'과 '대련'으로 와서 귀국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단동에서 두 번 호텔에 투숙할 수 있었고, 6.25 당시 폭격으로 부셔진 반쪽짜리 압록강 철교 끝자락까지 가서

신의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때, 회귀본능이 작동하면서 갖가지 상념들이 떠올랐습니다.

상념에 대해서는 잠시 뒤로 미루고

남한의 문제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백두산을 다녀온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내가 백두산을 다녀오고 3년이 지난 2018, 남한과 북한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있었습니다.

그때, 문대통령이 김위원장 안내로 백두산을 다녀 온 기사와 사진을 인터넷 검색으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문대통령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도 백두산 관광 시대가 곧 올 것이다"

중국 <장백산 코스>로 가지 않고, 북한 <삼지연 코스>로 - 남한 사람들이 백두산 관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취지의 발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반도 정세는 어떻습니까?

문대통령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예측 불허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한반도 정세는 항시 불안했고 어제오늘에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19458.15 독립을 되찾은 것으로 우리는 기억하지만, 해방의 혼돈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2차 세계 대전 이후 생겨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어느 쪽이건 세뇌 당해야 살 수 있는

<고슴도치 딜레마> 에 빠져버린 불행한 시대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슴도치 생존 전략을 따라야 합니다고슴도치는 바늘이 없는 머리를 서로 맞대면서 체온을 유지하거나

가시를 눕혀 상대가 찔리지 않도록 배려를 한다고 합니다.

<고슴도치 딜레마>는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한 말입니다.

그 말의 의미를 우리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가 자전적 소설을 구상하면서 <장백산코스> 백두산 관광에 나선 날짜는 201587일이었습니다.

김포공항을 이룩한 아시아나 여객기는 1시간15분 후 대련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여행사 가이드와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안내 책자를 다시 봤습니다. 대련에서 단동까지는 버스로 4시간 거리였습니다.

단동 국제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89시 출발한 버스는 2시간 30분 거리의 환인으로 이동하고, 거기서 고구려 유적을 둘러 본 다음, 다시 버스로 통화 시내에 있는 금강호텔에 가서 투숙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일정에 따라 99, 금강호텔을 나선 일행은 백두산 정상에 오르려고 북파에서 <장백산 코스> 전용 버스로 갈아탔습니다.

경사가 가파른 지점부터는 봉고차로 환승했습니다

백두산 <천지> 가까운 곳에 봉고차 주차장이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 걸어서 정상까지 갔습니다.

날씨는 쾌청했고, 정상까지는 단숨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천지를 본 다음

다시 봉고차와 버스를 갈아타면서 장백폭포에 갔다가 '송강하'로 가서 천사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109, <서파 코스>에서 다시 백두산 등정을 했습니다.

날씨가 흐리고 가랑비가 왔기 때문에 우의를 입고 정상에 올라가서도 구름 때문에 <천지>를 볼 수 없었습니다.

북한과 중국 국경선 표시, <5호경계비>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계단으로 된 등산로를 따라 하산한 다음

4시간 거리 통화, 금강호텔에 가서 투숙했습니다.

119, 호텔을 출발한 버스는 1시간30분 거리의 '집안'으로 이동했습니다.

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오녀봉을 둘러 본 다음, 다시 4시간30분 거리 단동으로 가면서 위화도 부근에서 유람선 관광도 했습니다.

압록강은 위화도에서 두 줄기로 나뉘어졌다가 합쳐집니다

동쪽 압록강은 북한 땅이었고, 강변 초소에 경비정도 있었지만 북한 군인들은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위화도에서는 총을 들고 경계 근무하는 농부도 있었습니다. 농작물을 지키려는 자율적 행동인 것 같았습니다.

모타 보트 한 대가 유람선으로 와서는 북한 새 지폐를 보여주면서 '달러'로 교환하자고 말했습니다

나는 일 '달러' 몇 장을 그에게 주고, 북한 새 지폐를 받았습니다. 고향을 다녀 온 기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당동에 와서, 다시 국제호텔에 투숙했습니다.

저녁 식사는 북한에서 운영하는 <묘향산 식당>에서 했습니다.

TV에서 보던 장면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식사 중에, 북한 여성들이 기타와 악기를 연주하면서 흥겨운 한국 가요도 불러주었습니다.

무대 공연이 끝난 다음, 연장자였던 나에게 북한 여성이 다가와서"반갑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악수를 청했을 때

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이산가족을 상봉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12일 아침 식사를 하고, 압록강 철교 공원으로 가서 산책을 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고, 반갑기까지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무렵, 평양 관료였던 할아버지는 <평양 기적>에 이름이 오른 나의 할머니와 연인 사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이 바뀌면서 당동에서 가정을 꾸민 조부모는 슬하에 22녀를 두었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단동 제3중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퇴락한 조선인 양반이었던 할아버지는 이국  당동에서 살림이 궁색했고, 할머니가 술집을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고, 

압록강 수풍댐 공사가 시작되면서, 조부모는 단동에서 신의주로 장소를 옮겨 기생집을 운영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부모에게는 말 못할 고민거리가 있었습니다

장남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작은 아들은 기생집 출입이 잦았던 일본인 기술자를 따라 수풍댐에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복군 지대장에게 시집 간 큰딸은 친정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딸 윤실이도 여성 빨치산 김정숙 부대원이라서 조부모는 항시 불안한 가운데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다가 815일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괴한들이 약탈을 자행하고 집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전 재산을 잃은 조부모는 상심한 나머지 울화병으로 두 분 모두 운명하셨다는 사실을 나는 모친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가 막힌 가족사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단동을 갔다 오면, 자전적 소설을 쉽게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다가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 낸 <빛바랜 사진>  3장이 가뭄에 단비처럼 잠재의식 속에서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려 놓았습니다.

   

19488월 7

강원도 화진포 앞바다에서 김일성 주석이 김정숙 여성 빨치산 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단연 압권이었습니다.

사진을 보면, 가운데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 아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김정일의 어린 시절 모습입니다.

그와 어깨동무 한 아이가 소련 군정 정치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 소장의 아들 알렉산더 레베데프이고

그 뒤쪽이 레베데프 소장부인, 그 왼쪽이 김정숙,그 앞이 김정일 누이 김경희입니다.

사진을 유심히 보던 나는, 맨 좌측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나의 고모 김윤실이라는 사실을 

예민한 직관력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사진 촬영 날짜를 보면 194887일입니다

그보다 1년 전, 고모는 사내아이를 출산했고, 그 보다 앞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과 결혼을 했습니다.

내가 평양 남산소학교 1학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평양철도호텔>에서 결혼식을 했습니다.

신부 쪽 사람으로는 우리 가족이 유일했습니다. 부모를 따라 갔던 나는, 소련 장교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난생 처음 보는 신기한 행사여서 그 때의 기억이 화석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김일성 부인 김정숙은 세 번째 아이 출산 후, 심한 하혈로 33세에 사망했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보았습니다.


<장백산 코스. 백두산 관광> 에 이어,

< 미군정 49, 평양 하늘 쾌청> 줄거리도 다음 회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동영상 -     https://url.kr/glny3e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그동안 잘 몰랐던 가족사에 대한 대강의 내력과 뿌리를 찾고픈 마음에 나서 백두산 나들이길 얘기 흥미롭게 감상했습니다.  어찌되었던 어린 시절의 편린이라도 어렴풋이 떠올리는 실마리가 되었다면 무엇보다도 다행으로 여겨집니다. 늘 평안하고 보람 되세요.

김춘봉님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제가 말하는 <자전적 소설>은 미국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역마차에 지나지 않습니다. .
민초(民草)에 해당하는 아나키스트는 태생적이고, -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이념은 학습을 통해서 후천적으로
만들어 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