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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02-18 15:42
이미지 없음
  • 바위로 보는 고대문명
  • 유자심
  • 고대사
  • 2014년 12월 25일
  • 변형신국판
  • 979-11-5634-062-1
  • 15,000원

본문

고대문명에도 기계장치가 사용되었을까?
사진으로 확인하는 고대문명!

역사책에서 배운 역사가 확실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배운 대로라면 인류는 원시시대에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 순으로 발전해서 현대문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대원시에도 문명이 발달했었다면? 일부에서는 현대문명 이전 고대에도 문명이 발달한 때가 있었다는 주장들이 있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이런 주장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저자는 직접 찾아낸 자료들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대문명에도 기계장치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를 바위를 통해 보여준다. 고대 선인들은 고인돌을 신성시 여겼고 여기에 생명 형상들을 새겨 넣었다. 일반 바위나 암반에서도 생명형상을 확인할 수 있다. 생명형상이란 사람, 동물, 새, 물고기, 파충류 등과 특정할 수 없는 생명체의 형상을 일컫는다. 바위에 이러한 형상들을 새겨 넣을 때 기계나 시멘트를 사용한 흔적들이 확인되었다.(편의상 모르타르, 콘크리트를 시멘트로 통일해 부르기로 한다.) 고대에도 기술문명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대에 시멘트를 사용했던 흔적
그리고 고인돌에 새겨진 생명형상

고대인들은 바위에 대한 기술에 특히 전문화되어 있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를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바위를 다루는 기술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전승되었고 지금은 그 대가 끊겨 우리는 불가사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저 유추할 뿐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인돌도 어떤 용도로 제작·사용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인돌에 형상이 새겨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자가 살펴 본 고인돌에는 자연적으로 생겨났다고는 할 수 없는 모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양평 앙아리 고인돌, 이천 지석리 고인돌 등 많은 고인돌에서 시멘트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시멘트로 생명형상을 새긴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자연적으로 생겨났다고 보기 힘들다. 고인돌에 새겨진 형상들을 보면 도구를 이용해 깎고 파낸 흔적이 보인다. 인위적으로 구멍을 뚫어 눈을 만들어낸 형상도 있다. 고대의 사람들은 바위를 모두 깎아 원하는 모양을 만들기 보다는 그 바위의 원래 모양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도록 형상을 새겨 넣었다.

저자의 주의 깊은 관찰력으로 흔히 지나칠 수 있는 바위에서 사람의 손길로 새겨진 형상들을 예리하게 잡아냈다. 저자가 직접 확인한 바위의 사진을 수록하고 바위에 그려진 형상대로 선을 그려넣어 독자들도 육안으로 확인하기 쉽게 하였다. 형상들이 중첩되어 있는 경우에는 함께 나타내었다. 각 형상에 사용된 도구들의 종류로 구분해 목차를 정리했다. 대체로 어떤 모양인지는 저자가 설명한 대로 확인할 수 있지만 그 형체가 불분명한 경우에는 직접 사진을 보면서 어떤 형상인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아도 좋다.

펴내는 글------------------------------------- 004

1장
시멘트의 사용 009
01. 이천 지석리 고인돌----------012
02. 서울 동망봉---------------049
03. 남양주의 냇가- ------------064

2장
돌 자르는 기계 069

3장
착암기 077
01. 착암기 사용의 흔적----------078
02. 남양주 냇가의 착암기 흔적-----082

4장
남해 바닷가의 착암기와 시멘트의 사용 흔적 095

5장
화순 고인돌 채석장의 생명형상 127

6장
기계, 시멘트가 사용된 곳의 생명형상 175
01. 단양 삼선암의 생명형상-------176
02. 남양주 냇가의 생명형상-------182
(1) 다양한 생명형상 / 182
(2) 물을 이용한 생명형상 / 207
(3) 다양한 인물상 / 211
(4) 냇가 옆 산의 생명형상 / 231
03. 남해 바닷가의 생명형상-------245
(1) 다양한 생명형상 / 245
(2) 물을 이용한 생명형상 / 279
(3) 암반에 그어진 흰색 선 / 303
(4) 주변의 생명형상 / 307

7장
고창 고인돌 채석장의 생명형상 321

유자심
저자는 오랫동안 우리나라 고대문명의 거석문화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본 해석을 내놓고 있다. 바위에서 보이는 고대문명의 생명형상과 산중지역의 고인돌이 그것이다.
그 제1서인 [배달민족의 신비] (해드림출판사) 출간 이후 저자는 여러 지역을 답사하다 현대에 행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착암기, 돌 자르는 기계 등 기계 장치의 사용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곳곳에 나타나는 흔적을 통하여 기계를 활용한 고대문명이 존재하였다는 것이 점점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바위와 암벽에 새겨진 상상을 넘어서는 규모의 생명 형상들은 이들 기계를 이용하여 새겨졌다는 것이다.

대규모로 바위들이 떨어져 나간 곳 아래에 잔해들이 없다는 것은 화순에서처럼 작은 바위까지 옮겨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위들이 모조리 옮겨지지 않는 한 잔해들이 남아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화순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큰 바위로는 고인돌을 만들고 작은 바위들은 고인돌이 있는 산 곳곳에 옮겨 놓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바위들을 잔해까지 모조리 옮겨 놓았을까와 어떻게 높은 산 정상 부근에서 바위를 떼어내어 산을 넘어 운반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바위들의 잔해까지 옮긴 것은 옮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암반이 크게 깨어져 드러나 있어도 잔해들이 있다면 바위들이 여기에서 옮겨졌다는 증거가 불확실 하여질 것이다. 그러나 잔해까지 모조리 보이지 않는다면 바위들이 옮겨졌다는 것이 될 것이며, 특히 고인돌이 밀집되어 있는 화순, 고창의 경우 옮겨진 것이 명확한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이곳이 고창
고인돌 채석장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연구자들은 왜 이곳을 채석장으로 지목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고인돌이 놓여 있는 산의 뒤에 있는 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산의 정상 부분에서 바위를 채석하여 아래로 운반하였다가 작은 산을 하나 넘어야 하므로 통나무를 밑에 깔고 끌어서 운반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라내어 어떻게 운반하였을까? 바위의 결을 따라 쐐기 구멍을 파고 나무쐐기를 박아 물을 부어 팽창시키거나 망치로 쳐 분리하는 방법은 쐐기 구멍을 파는 것부터 시작
하여 너무나 많은 일들이 필요해 보이고 결정적으로 잘려져 있는 암석들에 쐐기 구멍의 흔적이 나타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분리해 내었고 이 과정에 기계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운반과정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을 사용한 듯하다. 기존의 설명인 통나무를 아래에 깔고 끌어서 운반하는 방법은 표면이 크게 굴곡이 져있는 산에서는 시행하기 불가능할 것이다. 바위를 끌어서 운반하기 어렵다는 것은 다음의 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는 또 다른 재미있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잉카에 관한 공식 보고서(Royal Commentaries of the Incas」에서 역사상 잉카 제국의 왕이 사크샤우아만의 고대 성채를 건설한 선구자의 업적에 도전했던 일을 적어 놓은 것이다. 이 도전은 거대한 돌 하나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운반해와 성채에 추가하는 것이었다. “2만 명 이상의 인디오들이 산을 넘어 급격한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돌을 잡아당겼다. …… 그런데 어느 낭떠러지에 이르렀을 때 돌이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 아래로 떨어져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깔아뭉갰다.”
『신의지문』 上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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