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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02-18 16:58
  • 배신
  • 노원상
  • 소설
  • 2015년 05월 20일
  • 신국판
  • 979-11-5634-086-7
  • 13,000원

본문

불통의 시대, 그들

노원상의 장편소설 [배신]은, 힘으로 기록하였음직한 지난 역사를 뒤집어 재구성해 보며 부조리한 작금의 현실을 떠올려 보게 하는, 지성과 감동이 어우러진 역사 소설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피 토하듯 강변하였다. 민족적 수난을 절대 잊지 말자는 다짐이었고, 강하고 반듯한 나라를 세우자는 채찍이었고, 의리 없는 귀신을 응징하자는 분노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 소설 중심에는 신하의 안하무인 권력이 철저하게 능멸한 비운의 주체 연산군이 있다. 연산군은 과연 정치에는 관심 없던 폭군이었을 뿐일까. 연산군 이후 조선이 어찌하여 나약해져 갔을까, 야만인으로 무시하였던 일본이 어떤 힘으로 조선의 몰락을 가져왔을까.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조선의 연산군 시대, 연산군의 몰락과 함께 서서히 사양길로 들어서게 되는 조선을 때로는 비감스럽게, 때로는 안타까움과 울분으로 들여다보며 역사의 진정한 가치가 어디 있는가를 이 소설 [배신]에서 커다란 울림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연산군을 누가 폭군으로 기록하였을까

연산군은 당시의 환경에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는 폭은 넓지 않았다. 두 가지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 성종과 같이 훈구파와 사림파의 싸움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수많은 후궁과 술과 책을 벗 삼아 인생을 즐기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태종과 같이 신하들을 죽여서라도 왕권을 강화하여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길을 걷는 것이었다. 전자는 성군(聖君)의 길이었고, 후자는 폭군(暴君)으로 낙인 찍힐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었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과는 달리, 왕권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다. 13년이란 긴 세월을 세자로 있으면서 성종시대의 병폐를 지켜보았다. 아버지 성종의 길을 따를 수는 없었다. 연산군의 눈에는 그것이 나라가 망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연산군은 권력싸움에서 패하여 신하에 의해 쫓겨난 조선 최초의 왕이 되고 말았다. 모시던 왕을 쫒아낸 신하들은 공신이 되었다. 벼슬아치의 우두머리인 영의정도 공신이 되었고,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대통령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도 공신이 되어 부귀영화를 이어갔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과 그의 자손들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 왕위에 있었고, 연산군을 쫒아낸 공신과 그들의 후손들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반역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실록에 연산군을 폭군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들의 후손들은 조상의 반역을 미화하기 위하여 야사라는 이름을 빌려 살을 붙여가면서 연산군을 나쁜 인간으로 만들어갔다.

그들은 기록하였다. ‘주색에 빠져 제사를 폐했고, 부왕의 후궁을 때려 죽였고, 할머니 인수대비를 밀쳐서 그 충격으로 죽게 했고, 이복동생도 죽였다. 또 큰 어머니와 간통했고, 부왕의 후궁을 범했고, 이복 여동생과도 정을 통했고, 신하의 부인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겁탈했고, 정업원의 늙은 여승을 강간했다. 기생파티로 흥청망청 밤을 지새웠고, 금표를 설치하여 백성을 몰아내고 사냥을 즐겼다.’고.
이러한 기록이 사실일까? 아니면 승자에 의해 조작된 역사 왜곡일까?


백성은 배가 고파 죽어갔고, 나라는 기울어 갔다

왕도 신하도 불통이었고, 닭장 속의 싸움닭이었다. 모두 입은 열려 있었으나 귀는 닫았다. 나라 밖의 적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밤낮으로 싸웠다.‘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으나, 정작 그들의 안중에 백성은 없었다. 백성은 배가 고파 죽어갔고, 나라는 기울어 갔다.
배신! 불통의 시대 그들은 나라와 백성을 배신했다.

연산군이 몰락해도 조선 백성은 새로운 권력에 순응하면서 살았다. 성 쌓는 일도 없어졌고, 군사훈련(타위)도 없어졌으니, 당장은 오히려 편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고, 망국의 길이었다.
연산군이 쫓겨난 지 80여 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200만 명 이상이 죽었으니 백성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죽은 것이다.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굶주림에 죽어가던 백성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뜯어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을 겪고도 조선의 집권 세력은 반성하지 않았고, 백성은 깨어있지 않았다. 아무도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였으니 같은 실패를 반복했다. 일본에게 강제 병합되었다. 일본의 패망으로 광복을 맞았으나,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남북분단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무려 450만 명이 죽었다. 내 민족 내 이웃을 총을 쏴서 죽였고, 죽창으로 쑤셔서 죽였다.

이런 가슴 아픈 역사를 잊어서야 되겠는가?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을 찾기 위해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와 그 행간을 살펴, 잘못 알려진 역사를 바로 잡고자 저자는 이 소설을 쓰게 된 것이다. 분명한 회의를 가져올 다음 질문에 이 책은 명쾌하게 대답하게 된다. 연산군은 미치광이 폭군이었을까? 연산군이 쫓겨나던 날 목이 잘려 죽임을 당한 연산군의 후궁 장 숙원(장녹수)은 요부였고, 좌참찬 임사홍은 간신배였을까? 반정의 선봉 박원종은 구국의 영웅이었을까?

목 차

작가의 말_ 4
1. 제비의 꿈_ 18
2. 부왕의 유산_ 32
3. 예법을 따르소서_ 65
4. 이어지는 능상_ 96
5. 무오필화 _ 157
6. 내우외환 _ 222
7. 십방책_ 269
8. 갑자혈해 _ 329
9. 태평성대_ 404
10. 찬 탈_ 427
끝맺는 말, 조선의 유산_ 473

노원상

한국전쟁이 휴전하던 날, 지리산 기슭 섬진강변에서 태어났다.
지리산 기슭 섬진강변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이고,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서 보듯이 빨치산의 활동 공간이었다.

인생에 생로병사가 있고, 모든 조직에는 흥망성쇠가 있다. 태어나면 늙고 병들어 죽고, 흥망과 성쇠가 교차한다. 생로병사는 자연의 섭리이기에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나 흥망성쇠는 인간의 영역이니, 다 사람이 하기 나름이다.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해서 조선의 흥망성쇠의 단초를 밝혀보고 싶다. 그리고 이긴 자에 의해서 쓰인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보고 싶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실과 권문세족의 토지를 빼앗아서 백성에게 고루 나누어 주어서 민심을 얻었고, 이런 민심을 바탕으로 조선을 개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을 개국한지 불과 100년 만에 조선의 땅은 대부분 양반의 차지가 되어 버렸고, 대부분의 상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농사를 지어도 수확의 8할은 지주가 가져갔고, 나머지 2할로 세금을 내고 먹고 살아야 했다. 당연히 생활고에 허덕였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지주에게 높은 이자를 주고 곡식을 빌렸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되었다. 가난한 상민
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절망뿐이었다. 군역과 세금에 시달리는 가난한 상민은 스스로 노비가 되기도 했고, 빚을 갚지 못해서 강제로 노비가 되기도 했다.
김일손의 말대로 백성의 반이 노비였다. 역적으로 몰려서 노비가 된 자도 있었고, 가난해서 노비가 된 자도 있었고, 자손대대로 노비인 자도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할 수 없었던 상민은 군역과 가혹한 세금을 피해서 산속으로 숨어들어 화전민이 되기도 했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도 했다. 유랑객이 되어 구걸을 하거나 더러는 무리지어 도적질을 하였다. 이렇게 집을 떠난 백성이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북쪽 국경 지대의 많은 상민은 스스로 국경을 넘어 여진 땅으로 도망갔고, 그들 중 일부는 여진족의 길잡이가 되어 국경을 넘어와서 노략질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도망자를 방지하기 위하여〈경국대전〉에 오가작통법을 법제화하였는데, 이는 다섯 가구를 하나로 묶어서 이웃 사람이 도망가면 나머지 가구에서 도망간 이웃 사람의 군역과 세금까지 부담하게 하는 것이었다. 친척에게서 받아내는 것을 족징(族徵)이라 하고, 이웃에게서 받아내는 것을 인징(隣徵)이라 했다.
사대부의 삶은 극락이었고, 백성의 삶은 생지옥이었다.

연산군은 홍길동과 그를 따르던 떼강도 일당을 경상도 거제도로 유배하였다. 유배 중이던 홍길동 일행은 어느 날 갑자기 거제도에서 사라졌는데, 그들의 행선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구(琉球:오끼나와)로 떠났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홍길동에게 협력했던 당상관 엄귀손은 무예가 뛰어나 성종의 총애를 받아 당상무관인 평안도 우후를 지냈다. 원래 욕심이 많았던 엄귀손은 홍길동의 장물아비가 되어 뒷돈을 챙겼다. 비단 엄귀손 뿐만 아니라 많은 벼슬아치들이 홍길동에게 협력하고 뒤에서 배를 채웠다. 엄귀손은 모진 형장 신문을 이기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었고, 홍길동에게 협력하고 뒷돈을 챙겼던 그 밖의 대소 신료들은 3천 리 유배형에 처해졌다.
홍길동이 친국을 받고 백성의 비참한 실상을 임금에게 알렸는데도, 백성의 삶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설령 임금이 알았다고 하더라고, 임금의 마음과 귀와 입이 되어야 할 관리들이 변하지 않았으니, 백성의 삶이 변할 리 만무했다. 어무적은 절망했다. 홍길동은 유배 중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이젠 더는 기댈 언덕조차 없어졌다.
_본문 ‘내우외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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