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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0-02-19 15:07
  • 남도의 노래
  • 양영수
  • 시집
  • 2017년 03월 20일
  • 150*210
  • 979-11-5634-182-6
  • 10,000원

본문

나는 시를 고귀한 자의 슬픈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고단한 남도인들, 노래가 삶이 되고 삶의 위안이 되네

끝나지 않는 남도의 노래여, 살아가라!

自序•5
跋文•170
Euphonia를 꿈꾸는 고독자의 노래
_정희승(소설가, 에세이스트)

1부 春篇
14•아버지의 레시피
16•裸木
18•가우도 출렁다리
19•사초항
20•새꼬막
21•정수사
22•영랑생가
23•國家란 무엇인가
26•벚꽃
27•도갑사 가는 길
28•영암버스터미널
30•김남주 생가
32•해남 고천암
34•月下村
35•해남 대흥사
36•三鶴島 전설
37•거문도 등대길
38•바다
39•장마
40•육체의 시간
41•제주는 유혹한다
43•종다리
45•항구의 사랑
46•마도로스의 노래
49•목단화
52•다시 대흥사에서
54•弔鐘
56•빈 배
58•無題
59•도깨비
61•새가 노래하는 이유
63•투명인간
66•에피쿠로스
68•김인용을 위하여
70•靑丹이

2부 秋篇
74•금당산
76•여자를 위하여
78•진검승부
79•첫사랑
81•그림노우트
83•오래된 문답
85•불멸의 연인
87•獻詩歌
89•유리여자
90• 나의 신부여,
나의 아내여
92•作名의 사연
93•눈물의 의미
94•어머니 나무
95•연민
97•변명
100•사랑의 정의
101•사랑의 역설
103•삼각관계
104•생활의 발견
106•新추천사
107•외씨버선
108•獨酌
111•喜怒哀樂
112•공후인
114•哀歌
115•우나 보체
116•‘亂中日記’를 읽고
117•生과 死
118•遺言詩
119•풍류방
122•한 걸음만
124•인쇄쟁이 강은기씨
126•절망의 노래
128•장승

3부 美學
131•공재의 肖像
132•모딜리아니의 누드
134•밤의 美學
136•비너스의 탄생
138•오직 사랑과 예술만이 세월을 견딜 수 있다
140•이카로스
142•판소리
144•프로코피예프의 연주
146•詩論
148•뭉크의 키스

4부 시대상
151•시대상
152•시대상 2
153•시대상 3
155•시대상 4
156•시대상 5
158•시대상 6
160•시대상 7_ 비정규직
163•시대상 8_ 신용카드
166•시대상 9
168•시대상 10_ 검은색을 보는 방법

後白 양영수

·1959년 목포産
·1985년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졸업
·KT 근무
 

Euphonia를 꿈꾸는 고독자의 노래

정희승(소설가, 에세이스트)


들어가며

이 책의 저자인 친구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아쉬웠다. 너무 늦게야 만났기 때문이다. 목포 뒷개선창에서 허리띠를 풀어놓은 채 민어회나 홍어삼합을 놓고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할 수도 있었으련만, 고등학교 졸업 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친구의 독서량과 문학에 대한 열정을 늘 부러워했다. 대학시절에는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인 독서 모임에서 문학과 철학에 대한 심도 있는 공부를 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사회에 나와서도 주경야독하며 문학의 끈을 한시도 놓지 않은 줄 안다.
사실 나는 건강 때문에 술을 완전히 끊은 터라, ????남도의 노래????를 일별하고 나자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술잔 대신 찻잔을 앞에 놓고 지난날의 열정을 담담한 이야기 뒤쪽에 묻어두려니 성이 차지 않았다. 어떤 도취도 없이 맨 정신으로 이 세상을 건너야 한다는 사실이 이때만큼 나를 우울하게 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첫 독자가 되도록 분에 넘치는 배려를 해준 친구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읽고 느낀 소감을 몇 자 남김으로써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볼까 한다.


1.장소애(場所愛, topophilia), 남도

시집의 제목이 암시하듯 ????남도의 노래????에는 향토애, 다시 말해 장소애topophilia를 시편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의 주체는 남도야말로 ‘자연의 땅, 아껴둔 미래의 땅, 희망의 땅’이며 ‘한의 땅, 노래의 땅’이라고 진술한다.
‘장소place’는 인간 활동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공간space’과 구별된다. 장소는 인간과 관계 맺는 곳, 쉽게 말해 ‘거처’나 ‘있는 곳’이다. 인간의 삶과 유기적으로 얽혀 있으므로 자연스레 방향성이 생겨나고 의미를 띠게 된다. 그 안에 녹아 있는 상처, 기억, 역사 등이 그 본질quality을 이룬다. 반면 ‘공간’은 인간의 활동과 무관하게 그저 어느 쪽으로든 무한히 균질적인 확장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공허하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좌표계나 뉴턴의 물리학 또는 경제학의 단위로 측정되는 양quantity 외에는 어떤 의미도 제공하지 않는다.
시의 주체는 남도라는 장소에 거주하는 자이다. 그는 스쳐지나가는 관광객이 아니다. 모르긴 해도 서울에서 보낸 대학시절 외에는 남도를 떠난 적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숙명적으로 남도에 살아야 할 팔자를 타고 났는지도 모르겠다.
하이데거는 객관주의와 계산적 사유방식을 부정하기 위해 물리적 방위 대신 비이성적이고 신비한 사중주Fourfold라는 일종의 (공간이 아닌) ‘장소의 틀’을 도입한다. 이는 하늘, 땅, 죽을 자(현존재) 그리고 신성이라는 4개의 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네 개의 단순한 열림을 사중주라고 부른다. 죽을 자는 거주를 통해 그 안에 존재한다. 거주의 기본적인 성격은 안전하게 함이다. 죽을 자는 사중주 안에서 본질상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는 그 안에 거주하면서 성찰적인 사유를 하고 시짓기를 한다. 그러므로 지나쳐버릴 뿐 머무르지 않는 관광객은 장소에 깃든 신성이나 신비함, 경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저 방문한 모든 곳이 “비-장소”일 뿐이다.
사람들은 어떤 장소에 대한 본인의 애정을 이야기하지만, 장소가 되돌려주는 사랑, 장소가 우리에게 주는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성간의 사랑이 그렇듯, 진정한 장소애 역시 일방적인 게 아니라 주고받는 것이다. 시집 곳곳에서 이런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의 주체는 눈과 귀를 열고 마음을 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성찰하고 감사해하고 느끼는 자신을 장소에 넘겨준다. 동시에 그 장소가 새롭게 열어준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다. 석동마을 앞 탐진강 지류에서도 장소와 주체의 눈부신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길을 가다 차를 멈춘 것은
봄날 풍광이 너무 눈부셨기
때문이었다.

석동마을 앞 탐진강 지류는
은빛 물결이었고,
봄산 초목들은
금빛 장식이었다.

한가로이 노는 물오리와
더불어 한가로운 낚시꾼

개나리 진달래 지천에 피고
벚꽃은 滿開를 기다리고

꽃길 꿈길 깨어보니
살이 고운 비단나무 한 그루
다소곳이 옷을 벗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황홀한 봄날이었다.

(「나목」 전문)

시 전편에 주체와 장소 간에 미세한 신경세포들이 감응하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특히 주체의 존재가 새롭게 개현하는 ‘꽃길 꿈길 깨어보니 / 살이 고운 비단나무 한 그루 / 다소곳이 옷을 벗고 있었다’ 하는 대목은 절창이다. 그러고 보면 정신세계도 일종의 풍경이다. 서정시가 내적 풍경과 외적 풍경이 서로를 반영하는 접면에서 탄생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진실한 장소애야말로 좋은 시의 필요불가결한 요건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장소애는 이 외에도 거문도 등대길, 해남 고천암, 도갑사 가는 길, 사초항, 정수사, 김남주 생가, 무위사, 대흥사, 동명동 딸각다리, 삼학도, 유달산, 다산초당, 해남 장소마을, 월하촌, 화원 온덕마을, 임성역, 광주 금당산, 땅끝마을 등 시집 곳곳에서 무수히 산견된다. 시집 제목을 공연히 ????남도의 노래????라고 붙인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2. 노래 그리고 문학의 정치성

문학은 우리를 구속하는 습속화된 사회적 매트릭스, 즉 언어와 존재 그리고 세계의 좌표들에 저항하는 힘은 물론, 새로운 감각적 틀을 발명하여 도래할 삶의 형식까지도 갱신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랑시에르는 예술의 정치성이란 기존의 지배적 담론 체계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거나 공격하는 데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지배적 담론 체계를 파열시켜 새로운 종류의 감각적 분배를 실현하여 궁극적으로는 삶의 형식을 바꾸는 데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 문학사에도 감각적 분배가 뚜렷하고 크게 재편된 시점이 있었다. 근대문학이 시작되면서 이광수는 신문학을 전통적인 문文과 구분하여 문학文學, Literature이라 명명했는데, 이 문학의 발흥과 함께 진실이나 도道보다는 허구를 중시하게 되었다. 알다시피 고래로 ????논어????의 ‘자불어子不語 괴력난신怪力亂神’이라는 언명에 따라 괴이怪異, 용력勇力, 패란悖亂, 귀신鬼神과 같은 허황된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을 배격하였다. 하지만 문文이 문학文學으로 바뀌면서 진실과 허구 간의 무게중심이 완전히 역전된다. 더불어 수창하며 향유하던 전통적인 시가詩歌는 결정적으로 읽기, 즉 감상 중심의 시詩로 바뀐다. ‘시가’가 노래의 일종이라면 ‘시’는 언어의 내적 리듬감과 운율이 남아 있기는 하나 노래라고 볼 수 없다. 시조창과 같이 음률에 실어 노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시기에 진통적인 지배적 담론질서를 파열시키며 삶의 형식까지도 바꾸는, 다시 말해 넓은 의미의 정치적 지형도까지도 바꾸는 감각적 분배가 새롭게 이루어진다.
하지만 시가 감상, 즉 읽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고 해서 꼭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삶 속에서 향유하지 않다 보니, 다시 말해 시를 음률에 실어 노래하지 않다보니 내용이 난해해진 쪽으로 기운 데다 이로 인해 점점 독자에게서 멀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시의 주체는 「詩論」에서 세상인심이 길수록 각박해져 가는데도 오히려 반서정 쪽으로 기운 난해한 시들이 범람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는 가슴으로 노래하는 서정시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청춘들은 廣場에 나와 새의 노래를 불러라’, ‘좋은 노래만이 우월하다’고 목청을 높인다. 시집 제목에 ‘노래’가 들어간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2016년 노벨 문학상에 주옥같은 가사를 선율에 얹은 싱어송라이터인 밥 딜런이 선정된 ‘사건’을 두고, 문단 내에서는 말들이 많다. 함께 향유하는 힘을 잃어버린 시에 대한 하나의 경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감각적 분배를 예전 상태로 환원하려는 그의 주장은 대단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의 시론이 잘 반영되어 있는 「가우도 출렁다리」란 작품을 살펴보자. 매연마다 4·4 4·4 4·5 율격을 정확히 따르고 있어 입으로 흥얼거리기만 해도 노래가 되는 시이다.

강진바다 봄바람에
우리 애인 조막 가슴
술렁술렁 술렁거리네

찰랑찰랑 갯바람에
우리 애인 검정 머리
찰랑찰랑 찰랑거리네

살랑살랑 꽃바람에
우리 애인 꽃신 신고
사뿐사뿐 다리 건너네

가우도 출렁다리
자동차는 못 간다네
출렁출렁 출렁거리네

(「가우도 출렁다리」 전분)


그렇다고 꼭 정형 율격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시란 노래로 불러지면 더없이 좋으나,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입에서 입으로 쉽게 오르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가요나 민요, 판소리 등을 연상시키는 「신추천사」, 「판소리」, 「항구의 사랑」, 「공후인」, 「마도로스의 노래」, 「헌시가」 등과 같은 시편들에서도 노래를 중요시하는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시의 주체는 베를리오즈가 꿈꿨던 음악의 이상향인 유포니아Euphonia가 남도에 도래하길 염원하는 걸까?
내가 알기로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매우 짧은 기간에 완성이 되었다. 약 7개월이 소요된 줄로 안다. 폭발적인 분출에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따름이다. 철저히 감상적인 허구를 배척하고 사실과 진실을 담아 꼭꼭 눌러 쓴 것들만 담았다. 고통 받는 내면과 진실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꼭 고음질의 hi-fi만 고집하지 않았다.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보다 때로는 조금 거친 lo-fi가 더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교와 진실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경우 진실 쪽을 택했다는 말이다. 회사 동료나 지인의 실명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연히 진실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최소한의 수정에 그쳤다. 이는 끊임없이 고치고 고침으로써 식자공을 절망에 빠뜨렸던 마르셀 프루스트가 고수했던 밤의 글쓰기와 배치되는 방식이다. 자기 작품들을 더 좋게 고쳐 쓴 적이 없다고 말한 로베르트 발저와 같은 낮의 글쓰기 방식에 가깝다 하겠다.
또 하나 이 자리에서 밝혀두고 싶은 점은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는 것을 한사코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몇 번이나 종용하였으나 그의 완고한 고집에 그만 내가 지고 말았다. 모두 문학이라는 세속적인 장 내에서 하나의 노모스nomos로 작동하고 있는 ‘등단-문예지 작품 발표-시집출간’이라는 선분을 따라갈 때, 그는 이런 질서에 파열을 일으키는 클리나멘clinamen이 될 것임을 자임한 것이다.
이렇듯 그는 습속화된 삶에 저항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창안하려는 미학적 기획, 다시 말해 권력에서 해방되는 실천에 철저하게 투신한다.
당연히 시의 주체는 세상과 절연한 예술보다는 세상과 뚜렷하게 연결되어 있는 예술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고 다음의 격조 높은 시편에서 보듯 서정성을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 百家爭鳴이
만개한 벚꽃처럼 분분하네
진리는 단순한 것인데

경칩 때 개구리 튀어나오듯
人生到處有上手라네

스승이 없는 시대
목소리 높은데
한 소식 없네

아,
나는 또한 靜寂이 두렵네

(「시대상」 전문)


우리는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욕망 앞에 윤리적 공준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게다가 세계화 시대의 신자유주의 물결이 밀려들어 무한 경쟁을 부추김에 따라 존엄하고 품위 있는 삶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시의 주체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추상적인 사회적 힘들에 의해 현상되는 소외와 사물화에 저항하는 뚝심도 여실히 보여준다.


도로를 주행해도 통행료가 있고
주차를 해두려도 주차료가 있는
자본사회를 나는 꼼짝없이 서 있다

동물은 왜 동물인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이 없으면 나는 동물도 아니다

(「시대상 6」 부분)


비정규직이 반대하는
비정규직 보호법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부조리하고
불공평하고
비정상적인
비정규직 제도를 깨고
어떻게 노동의 가치를 세울
것인가?

(「시대상 7」/ 비정규직」 부분)


카드는 분할의 마법으로
당신을 빚의 노예로 만들고
풍선효과는 반드시 바람이
새거나 터지고 마는 것이다

(「시대상 8」/ 신용카드」 부분)

이 외에도 「인쇄쟁이 강은기씨」, 「발언」, 「국가란 무엇인가」, 「팽목항에서」와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시대상’의 연작의 나머지 시편들을 음미해볼 만하다.


3. 관계의 미학

시편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며 어떤 힘이 이렇듯 많은 이야기를 단시간 내에 폭발적으로 분출하게 한 것인지 무척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유언시遺言詩」에 눈길이 머물렀다. 사실 이 시집에 실린 모든 시편들은 유언시로 읽어도 무방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만큼 진실과 진정성을 담아 썼다는 말이다.


한바탕 야단법석이 끝나고
완벽한 정적이 오겠지

旅宿을 떠날 때
내가 뿌린 원망을 가져갈 수만 있다면

삶을 탐내고 죽음을 설워하는 내겐
후회와 미련이 많은 세상이었다

나의 情을 기억하는 사람들만
울거라

(「遺言詩」 전문)


이 시에 나타난 바와 같이 혹시 그 힘은 후회에서 나온 게 아닐까? 후회야말로 이야기하려는 열망이 아닌가.
시편들을 면밀히 읽어보면 주체의 정신세계는 위상학적으로 가족과 사랑, 직장과 예술, 생과 사, 유신론과 무신론, 욕망과 체념 사이의 경계지대에 걸쳐 있는 것 같다. 이는 의지나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자신도 어찌해볼 수 없는 숙명, 또는 타고난 성품으로 보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두 대극 사이에는 ‘식역(識閾, limen: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있는 지대)’이나 ‘림보(limbo: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세계)’와 같은 다양한 중간지대가 존재한다. 이 사이 세계야말로 주체가 거주하는 장소가 아닌가 한다. 경계인은 어느 한쪽에 철저히 헌신할 수 없게 마련이어서 후회가 따를 수밖에 없다. 주체는 이 ‘림보’에 갇혀 신음하고 괴로워한다.
그렇다면 림보에 갇혀 있는 주체의 심적 나상과 인간 관계론이 심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관계는
관계가 관계를 맺어서
사방팔방 거미줄을 친다

기본형은 삼각형 관계

好·不好가 상호작용하여
관계에 영향을 미쳐서
관계를 복잡화 한다

男女의 삼각관계는 이진조합으로
더 복잡한 8개의 유형이 된다

이중 삼중 삼각관계는 16, 24개
유형으로 확장된다

우리 두 사람은 어떤 사이일까?
< 1변이 열린> 3각 관계,
트라이앵글

(「삼각관계」 전문)

이 시는 자신의 인간 관계론을 명쾌하게 다룬 기하학적 증명에 다름이 아니다. 시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인간관계를 삼각관계로 본다. 이 삼각형이 끝없이 증식하면서 거대한 그물망을 이루는데,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관계는 한 꼭짓점이 열린 트라이앵글로 규정한다. 둘의 관계도 삼각관계로 파악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트라이앵글에 비유한 것은 관계를 일종의 음악으로 여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왜 꼭짓점 중 하나가 개방된 구조일까?
이 열린 곳이야말로 주체의 자리인 림보가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해 그 자리는 회화에 음악을 도입한 칸딘스키 식으로 말하면 ‘기하학의 점’, 즉 접속 및 운각(韻脚, scansion)의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주체는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관계의 삼각형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삶에는 망명이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존재론적으로 투명인간이 되는 수밖에 없다. 벗어날 수 없으니 자신의 존재를 무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고뇌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림보에 갇힌 그는 참으로 괴로운 것이다.


4.고독한 주체, 나

그는 투명인간이 되어 그곳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의 각도와 하늘에서 빛나는 성좌의 각도를 측정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더불어 말과 침묵, 슬픔과 고독 사이의 각도를 측정하고 싶은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사람에 실망한 나머지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열린 지점들을 통로 삼아 바람처럼 떠돌고 싶은지도. 그러고 보면 주체가 위치한 삼각형 꼭짓점은 각도 계측소인 셈이다.
‘감정표현이 없고 자기주장이 없는 투명인간’, 그는 말한다.

사람의 본색을 보는 것은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투명인간은 일종의 보호색

전갈은 독이 오를 때 가장 아름다운
색깔을 띤다고 한다―戰意를 가질 때, 나는 나다

전갈자리는 나의 별자리
해는 또 다시 진다

(「투명인간」 부분)

투명인간의 또 다른 모습은 「도깨비」이기도 하다. 일견 ‘도깨비란 놈은 유물적으로 실존하지 않지만 유식적으로 현상하는 기물’이어 투명인간의 대극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부처님 손바닥 뒤집기’라는 진술이 암시하듯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우리가 모두 도깨비’이며, ‘도깨비춤은 우리들 사는 모양’이고 ‘도깨비 방망이는 우리들 소망’이라고 말한다. 에밀 시오랑의 만트라를 떠올리게 하는 언명이 아닐 수 없다. ‘우주는 고독한 곳이다. 그리고 모든 생명은 각자의 고독을 강화할 뿐이다. 그 속에서 나는 유령들과 마주쳤을 뿐, 살아 있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우린 도깨비로, 유령으로, 그림자로, 가면으로 사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주체가 허상을 벗고 마지막에 드러내고 싶은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이 지점에서 도깨비는 「장승」과 만난다.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잠시 인도의 신화시대로 떠나보자.
아주 먼 옛날 아귀가 배가 고파 시바 신에게 자비를 구한다. 그러자 냉정한 신은 “배가 고프거든 너 자신을 먹어라” 하고 명한다. 아귀는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발에서부터 점점 위쪽으로 자신을 먹어 올라오기 시작한다. 결국 마지막엔 얼굴 하나만 덩그러니 남겨놓게 된다. 시바 신은 그 얼굴에 ‘키르티무카Kirtimukha’, 즉 ‘영광의 얼굴’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리그베다????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을 먹으며 한 생을 사는 셈이므로. 누구에겐들 어찌 만만하고 쉬운 삶이 있겠는가. 험난한 여정을 거쳐 한 생을 살아낸 얼굴이야말로 진실로 키르티무카가 아닐 수 없다. 시의 주체는 죽을 때 영광의 얼굴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화난 건지 알 수 없는 장승의 얼굴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주체의 인생관이 잘 반영된 작품이 「빈 배」가 아닌가 한다.


時代를 잊은 선창가
작별이 흔한 곳
하꼬짝 같은 인생들

어찌 서러운 눈물 없겠느냐

빈 배와 허허 바다……
海印의 빗줄기
3중주 悲歌는 무엇을 전하려는가?

빗소리는 가장 슬픈 노래

한 사람의 고독도 없이
두 사람의 사랑도 없이
세 사람의 다툼도 없이

安住할 집 없는 빈 배는
泡沫이 되리라

(「빈 배」 부분)


이 작품에도 빈 배, 허허 바다, 빗줄기라는 삼각관계가 나타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빈 배는 트라이앵글의 열린 지점과 유비관계를 갖는다.
‘해인海印’과 ‘빈 배’에서 주체의 사상적 근원이 불교에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시의 주체는 안주할 집이 없는 빈 배가 결국 포말이 된다고 말한다. 삶의 ‘덧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널리 알려진 라틴어 표현대로, homo bulla, 즉 인간은 거품인 걸까?
‘덧없음’은 ‘무상성’과 전혀 다른 아우라를 갖는다. 무상성과 달리 살아낸 다음에야 비로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므로. 행복의 의미를 끝없이 물으며 역경을 건너온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덧없음이다. 그것은 삶과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삶을 사랑한 자는 덧없음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삶의 모든 국면들이 다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가며

이상 나의 독서 흐름을 따라 몇 자 적어보았다. 나는 독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남도의 노래????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의 독서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주체가 자리한 삼각형 꼭짓점, 즉 림보를 각도 계측소라고 한 것은 사실 사뮈엘 바케트를 의식한 발언이었다. 로제 블랭에 따르면 바케트는 도피처 삼아 한때 위시에 소재한 마치 각도 계측소처럼 보이는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우리는 그가 그곳에 머물며 언어에 대해 숙고했다는 사실을 잘 안다. 또한 그가 한 말도 잊지 않고 있다.
“계속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하리라. 말들이 있는 한, 그것들을 말해야 하리라. 그것들이 나를 발견할 때까지, 그것들이 나를 말할 때까지, 계속 말해야만 하리라, 이상한 고통이여, 기이한 오류여, 계속해야만 하리라……”
나는 친구가 앞으로도 말들이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그것들이 자신을 말할 때까지 쓰고 또 썼으면 좋겠다. 글에는 나는 물론 세상까지도 치유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남도의 노래???? 발문
저자 양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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