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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2-01 16:48
  • 싹심이
  • 정영철
  • 해드림출판사
  • 2022년 09월 29일
  • 신국판
  • 979-11-5634-519-0
  • 16,000원

본문

순천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정영철 소설 싹심이, 해방 이후부터 여순사건 그리고 625전쟁 이후 보릿고개 시절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이념적 갈등과 경제적인 궁핍과 거친 사회적 정서를 바탕으로, 학교 브라스 밴드(brass band) 부장직을 맡고 있는 영식이와 서무실 여직원 싹심이라는 두 주인공의 인생과 사랑과 정신적 질곡을 그려내는 450쪽 분량의 방대한 장편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전남 순천시 순천고등학교이다. 순천고등학교는 예나 지금이나 명문 고등학교로 정평이 나 있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학교이다.

실제 이 소설을 쓴 정영철 선생도 순천고등학교 출신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에는 육성회비라는 명목이 있었다. 당시에는 교육계의 흑역사라 할 수 있는 사친회비, 육성회비, 기성회비 따위의 월사금을 냈다. 사회가 피골이 상접한 시절, 이 사친회비를 내지 못한 학생들은 교실에서 쫓겨나 집으로 돌려 보내지거나 아버지나 어머니가 호출을 당해 부모들은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치욕을 겪었다. 담임 선생님들은 사친회비 종용이 극심하였다. 수업을 못 듣게 하거나 시험을 못 보게 하거나, 이 소설에도 나오듯 심지어 졸업장조차도 주지 않았다. 소설 싹심이에서 주인공 영식은 사친회비로 인한 질곡은 고등학교 시절 내내 온몸으로 겪는다. 싹심이는 이런 영식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되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끝내 이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지만 영식의 브라스 밴드와 영심이의 노래 실력이 어우러져 이뤄내는 음악 스토리는 큰 감동을 자아낸다. 무엇보다 이들 사랑이 순수를 지향하고 있어 안타깝도록 여운이 길다.

이 소설의 특징은 스토리로만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적 질서의 가치판단이 미숙한 상태에서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이 겪는 부당한 상황에 대해, 작가는 여러 증거를 제시하듯 예시를 들며 자신의 사유와 철학과 가치판단을 통해 이들 상황을 단죄하며 스토리를 이어간다.

한편 정영철 소설가는 현재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다. 이 나이로 500쪽 가까운 장편소설을 써내는 호흡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더구나 그는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만큼 가혹한 육체적 고통을 겪은 상태에서 이 소설을 완성하였다.

 

 

극작가 정조와 소설과 정영철

 

희곡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순천에 희곡 창작의 문을 열어젖힌 작가가 있다. 바로 극작가 정조이다. 장병호 선생이 엮은 [순천의 인물 100](해드림출판사)을 보면 정조 선생은, 독자층이 얇은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희곡 창작에 열정을 쏟아 두 권의 희곡집을 출간하는 등 한국 희곡문학의 발전과 저변확대에 힘썼다. 정조(鄭竈, 1931~2014)는 본명이 정영수(鄭永洙)이고,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공직생활을 했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도깨비>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첫 희곡집 마지막 기수(수도문화사, 1965)와 두 번째 희곡집 영웅행진곡(지혜네, 2000)을 출간하였다.

그의 희곡은 대부분 해학적 성격을 띠며 희화화된 인물이나 부정적 인물, 비인간화의 모습을 드러내며, 그 바탕에는 신랄한 풍자 정신이 깔려 있다.

한편 시와 수필 창작에도 손을 대어 시집 말 여덟 마리를 모는 마부의 꿈(1988)과 수필집 어느 애처가의 환상여행1995) 어느 별들에 관하여(2001), 만나자고 해놓고(2009), 초승달과 벚꽃 그리고 트럼펫(2011) 등을 펴내기도 했다. 희곡으로 등단했지만 시와 수필을 아우르며 폭넓게 창작활동을 한 것이다.

정조 동생의 친동생이 바로 정영철 소설가이다.

 

뒤늦게 글쓰기를 시작한 노 소설가의 열정

 

정영철 소설가는 왜 뒤늦은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하였을까. 형인 정조 선생을 떠올리면 글쓰기가 정영철 소설가에는 필연일 수 있고, 휴화산의 글쓰기 본능이 뒤늦게 용솟은 것이다. 다음은 정영철 소설가의 글쓰기 신념이다.

내가 글을 쓸 줄은 정말 몰랐다. 상상도 하지 않았다.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이었고 꿈속에서나 있는 이야기이며 극한 직업같은 것이었다.

살아오면서 내가 500여 쪽이 되는 장편소설(이 소설 싹심이는 본래 500쪽이 훌쩍 넘는 분량이었으나 퇴고 과정에서 분량을 조금 줄였다)을 써내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당연히 글다운 글을 써 본 적도 없었다. 글이란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반복되는 우연적 사건에 대한 결론 없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교 시절 학교 문예지에 시나 수필을 실었던 기억과 밤새워 연애편지를 썼다 찢었다 했던 기억, 친구가 자기가 좋아하는 소녀에게 보낼 편지를 써 달라고 해서 연애편지를 써 준 적도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암 진단을 받은 이후 낙서하듯 글을 쓰게 된 것은 글을 쓰고 있는 그 시간에는 육체적 고통을 잊을 수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었다.

매일 조금씩,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리는 늦깎이 나이에 글을 쓴다는 그것이 그냥 긁적여 보는 한 줄의 낙서라 할지라도 쉽지 않았다. 지금도 컴퓨터를 켤 때마다 내가 무엇을 쓰려고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욕심에 미치지 못하는 초라한 필력 때문일 것이다. 아름답고 가슴을 울리는 글을 쓰겠다는 욕심 뒤로 가슴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넘쳐났지만. 막상 글로 표현하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이 내 삶의 어떤 곳을 가리킬지 내 삶을 어떻게 표현할지 마냥 두렵고 망설여졌다. 어쩌면 쓰레기통 속으로 직행할지도 모르는 글을 미련스럽게 그만두지 않고 계속 쓰고 있다. 아마도, 어쩌면 죽는 날까지가 아닐까?

살아간다는 것이 사라져 가는 것이라면 살아있는 동안 무엇에 나를 의탁해야 하는가. 삶의 시간이 얼마가 될지도 모르는 미래라는 단어는 그저 생소하기만 하다. 낙서처럼 긁적여 보는 글에 옳고 그름이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에 어느 것 하나 정해진 답은 없는 것 같다.

 

글을 쓰는 이유라면 별게 없다. 웃음이든 울음이든 우리 모두의 가슴에 조금이라도 뭔가를 남기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단 한 줄의 글로, 한 줄의 문장으로, 한 마디의 말로 당신 가슴에 내 이름이새겨지면 족하지 않을까?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난다. 작가에게는 문학이란 마음을 닦는 기도이고, 아픈 상처를 깁는 치유제이자 영혼의 지향점에 의문을 던지는 보랏빛 실루엣이다. 그리고 잃었던 미소를 회복할 수 있게 해준 삶의 유일한 동반자로 눅눅한 삶을 지탱하는 회초리라고도 했다.

고래도 칭찬에는 춤춘다고 했다. ‘()’이란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하지만, 학창 시절을 제외하면 받아본 기억이 없다. ‘노력상’, ‘감투상’, 아니, ‘찌지리 못난이 상조차도 나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졸필이기에 아예 그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정화요. 글을 읽는다는 것 또한 자기 닦음이라고 하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살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인생의 전환점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 그것은 전환점이었다.

마음을 편하게 갖고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사형선고를 거역하고 살아서 암 병동을 걸어 나왔다. 10여 년 전 살기를 포기하고 저승사자를 따라갔더라면 이런 글도 쓸 수 없을 것이다. 어느덧 망구(望九)의 나이를 훌쩍 넘어버린 요즈음 나는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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