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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12-29 13:37
  • 여수, 외발 갈매기
  • 엄정숙
  • 해드림출판사
  • 2023년 12월 31일
  • 신국
  • 979-11-5634-572-5
  • 15,000원

본문

아침에 우연히 책꽂이에서 낯선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隨筆學이라는 책인데 상당히 두꺼웠다. 아끼는 소장품의 풍모로는 손색이 없어 보였다.

‘200617일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시상식에서 시인 강수정이 보랏빛 국화 한 묶음과 함께 이 책을 선물했다.’라는 메모가 있다.

각별한 학습 단계도 없이 이렇게 나는 수필 작가가 되는 길을 허락받았다. 국화 한 묶음이 나를 시간 저편으로 데리고 갔다. ‘하던 짓도 멍석을 깔아놓으면 안 한다라는 옛말이 비수처럼 스친다. 적지 않은 나이에 큰 상을 탔는데도 애면글면 글쓰기에 매달리지 않았다. 스스로 소산을 갈무리하지 못한 것 또한 뉘우치기에는 늦었다. 그리움도 짐이 된다. 그리운 것이 없으니까 미움도 후회도 없다. 말이 전혀 되지 않은 말을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 살필 겨를이 없다. 해가 저물고 그동안 내 곁을 떠난 사람도 여럿이다.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 사람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서 장수를 누리는 사람들, 빈약한 책 내용이지만 그들이 더 기뻐해 줄 것 같다.

 

지금은 날마다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나의 자작시 바닷가의 집에서 산다. 빈집인 줄 알고 이사를 왔는데 누군가가 베란다에 서서 꽝꽝 못을 박아 놓아서 할 수 없이 바다와 함께 살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 두 번씩 집을 비우는 바다를 보며 마음 비우는 법을 배우며 산다.

나는 바퀴 달린 가방을 끌고 서울로 미국으로 돌아다니다가 역주행해서 돌아온 탕자다. 한쪽 다리가 잘린 외발 갈매기다. 나의 내력에 대해서는 옆집 사람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안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니까 바다도 나를 밀어내지 못한다. 바다와 살면서 말더듬이를 고쳤고 산천의 문장을 받아 쓴다.

수식어를 버리기로 했다. 주어와 서술어, 그리고 목적어가 있으니 든든하다. 미지의 세계와 못 배운 말들이 나를 기다리는 꿈을 꾼다. 내 생애를 퇴고하는 방법으로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는 듯싶다.

 

펴내는 글 4

 

 

1

복사꽃_12

타국의 거리에서 14

그 가을에 겪은 낭패 21

구두를 닦으며 26

봄은 꽃신을 신고 온다 31

목단꽃으로 피고 싶다 37

가을 파묘_44

회전초 생각_46

리모델링 48

태풍의 계절 55

 

 

2

장날 소회 63

환절기_68

진자 언니 70

집으로 가는 길 76

외발 갈매기 81

소소한 일상 87

복사꽃 피면 92

() 97

외할머니의 붕어빵 102

비누 냄새 107

친구 생각_112

가을_113

 

 

3

새벽_116

뷰포인트Viewpoint 117

까치 소리 123

신발에 대한 나의 소견 129

그게 아니었다 134

개똥 이야기 140

구두 수선공 146

쥐약 151

의자의 하소연 158

냄새_164

입동 부근_166

 

 

4

강물에 쓰는 에필로그_170

잿빛 하루 172

적막한 바닷가 178

죽 쑤는 남자 184

흰머리 소감 189

그릇을 씻으며 195

새벽 단상 202

뒤늦은 안부 208

감나무를 베끼다 214

말년 일기 219

그래도요 225

울컥_229

겨울 월호동_230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2003시사사시 당선, 2006매일신문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여수 <해양문학상> 시 부문 대상 수상, 캘리포니아 <여성문학상> 시 부문 수상, <목포문학상> 시 부문 남도작가상을 수상했다.

시집갈매기 학습법이 있다.

집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은 장미정 사건을 토대로 제작한 픽션 영화다. 한국인 주부가 마약 운반범으로 프랑스 오를리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보석을 운반해 달라는 국제 마약 조직에 속아 다량의 코카인이 든 가방을 맡은 주인공이 2년 동안 먼 타국의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재판에서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는 저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였다. 억울함과 분노와 슬픔의 용광로에서 빠져나온 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집으로 가고 싶어 한다. 집으로 가는 길은 가깝고도 멀어서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들도 있다.

몇 년 전에 치매를 앓던 사람이 집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인근 밭두렁에서 죽은 일이 있다. 마음만 집으로 가고 몸은 바람을 따라간 모양이다. 집을 버리고 나간 노숙자나 가출한 사람들도 꿈속에서는 집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빛을 가장 감동적으로 표현한 화가는 네덜란드의 렘브란트라고 한다. 고독과 궁핍한 생의 말년에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린 그림이 <돌아온 탕자>. 아버지에게서 유산을 미리 받은 아들이 술과 여자 등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만신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품에 안긴 모습을 그린 종교화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아버지의 눈에 초점이 없다. 하루도 쉬지 않고 눈물로 아들을 기다리다 짓물러 버린 눈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손은 양

쪽 손이 서로 다르게 그려져 있다.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과 아버지의 강인한 손이다. 용서와 치유의 상징으로 그려져 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아들을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이 한 손은 지그시 누르고, 한 손은 따뜻하게 쓰다듬는 모습이다. 고난으로 얼룩진 렘브란트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고 싶은 신의 품속임이 틀림없으리라. <돌아온 탕자>는 성경의 누가복음’ 15장에 자세히 적혀 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의 쾌락과 유혹에 빠진 우리에게 죄를 묻지 않을 테니 빨리 돌아오라는 간곡한 비유의 말씀인 것을 나는 오래전에 읽었다.

나는 가끔 집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호화로운 아파트건 임대 아파트건 전원주택이건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던 단칸방도 내일 걸어갈 길을 생각하는 나의 둥지였다.

 

하찮은 미물도 집으로 가는 길은 분주하다. 우리 아파트 반지하에 살고 있는 개미들도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간다. 며칠 전 나는 놀라운 개미 행렬을 만났다. 인양된 난파선 같은 대형 사마귀를 끌고 개미들이 집으로 가고 있었다. 행렬의 보폭은 한결같고 일사불란했다. 개미들은 트랙을 관통하는 하이웨이 속도를 감추고 느리게 걸었다. 발과 발의 연결로 치밀하게 계산된 걸음이 마치 운구 행렬처럼 장엄하고 숙연하기까지 했다. 가본 길과 가보지 않은 길 사이에서 머뭇거리다 자주 되돌아온 길에서 뜻밖의 횡재를 한 모양이다. 매일 반복의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군침을 흘렸을까. 휴식과 축제의 시간을 위해서 개미들은 집으로 가는 길, 풍화되지 않은 그들만의 문명 속으로 서서히 걸음을 옮긴다. 터널과 땅굴 속에는 먹이를 저장하는 방도 있고, 알의 방과 애벌레의 방, 여왕개미의 방, 수개미와 번데기의 방도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사는 집보다 훨씬 진화된 구조인 걸 보면, 필시 빙하기를 기억하는 종족일지 모르겠다. 개미들이 노획물을 다 운반할 때까지 나는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개미집 퇴치를 위해 반상회를 연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이 설렌다. 읽다 만 책들이 흩어져 있고, 급히 씻어 놓은 그릇들이 봉분처럼 엎드려 있는 집, 불평과 짜증과 권태가 고여 있어도 내게는 이 세상 어디보다 쉽고 만만한 곳이다. 전화벨이 울리고 숟가락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집, 월말이 되면 잊지 않고 고지서가 날아들고, 위아래 집으로부터 약간의 소음이 들린다. 귀 기울여 보면 너나 나나 사는 것은 일반이다. 가끔은 적막을 깨트리는 소리가 반갑기도 하다. 그 힘이 하루를 들어 올리기도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임종을 앞에 둔 지인이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에 더듬거리며 하는 말은 집에 가고 싶다.”였다. 햇살과 구름과 비와 바람으로 얼룩진 <집으로 가는 길>이 이승의 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인 것을 새삼 알겠다.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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