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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르네상스 기행(7) - 밀라노, 근대문명 선구는 고대 로마 > 자유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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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미완의 르네상스 기행(7) - 밀라노, 근대문명 선구는 고대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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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춘봉 댓글 2건 조회 408회 작성일 23-03-25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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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 https://blog.naver.com/bchistory/223021132403


417일 오전, 베네치아 관광을 끝내고, 밀라노를 향해 출발한 버스는 이탈리아 북부 룸바디아 평원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3시간 달려, 오후130분 밀라노에 도착했다.

이동하는 3시간 동안, 나는 차창 밖 풍경에는 관심이 없었다. 노트북 파일을 열고 작업에 열중하면서 가이드와 대화도 나누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두오모, 그러니까 성당 관광을 빼면 여행이 이뤄지질 않습니다. 밀라노의 대성당은 600년 동안 차곡차곡 지어진 건물입니다. 1386년부터 시작해서, 1965년 완공했습니다. 축구 경기장 1.5배 넓이로, 바티칸 베드로 성당과 스페인 세비야 다음으로 큰 성당입니다.”

가이드가 한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다른 생각을 했다.

인류는 그동안 암묵적 협박을 당해왔다. 종교는 성역이고, 감히 건드릴 수 없다는, 또는 아껴야 한다는 식으로 세뇌 당해 왔다. 그와 동시에 가톨릭은 주술적 이론과 문학적 여흥거리를 생산하면서 부와 권력을 쟁취해 왔다.

주술적 학습 강요는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고, 문학적 여흥거리는 중세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단테의 신곡.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헨리크의 쿼바디스, 멜 깁슨의 패션오브 크라이스트

1956년에 개봉한 십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렇게 기독교 선전용 영화와 같은 문학거리를 생산하기 이전부터 가톨릭은 두오모 문화권을 만들면서 도시마다 수호성인 동상도 만들어 세웠다.

베드로와 바울은 바티칸 수호성인이다. 피렌체 수호성인은 세례요한, 베네치아는 마르코, 밀라노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수호성인이다.

베네치아의 경우 마르코 수호성인 추대(?)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서기828년 베네치아 상인들은 그 당시 아바스왕조 치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매장되어 있던 마르코 유해를 도굴하고, 유골을 가져오려고 이슬람교도들이 혐오하는 돼지고기 속에 유골을 숨기고 가져왔다

이것만 보더라도 가톨릭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톨릭은 서기1096년부터 174년 동안(1270) 예루살렘을 되찾으려고 십자군 원정을 8차례나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교황권의 쇠퇴와 기사계급의 몰락, 그리고 봉건 체제의 동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이탈리아 북부 페라라, 포를리, 만토바, 베로나, 파도바, 라벤나, 리미니와 같은 도시에서 참주(시뇨리아) 체제가 확고해졌다.

그런데 시민 공동체의 결정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던 참주들이 은근슬쩍 자신들의 권력을 종신직으로 만들면서, 돈으로 참주가 된 자도 있었다.

용병대장 조반니 아쿠토(1320~1394)는 영국인이면서도 피렌체에서 이름을 날렸고, 용병 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자는 밀라노의 참주(시뇨리아)가 되었다.

이처럼 편법을 써서 참주가 된 자들은 자신들 권력을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고 유럽의 지배권을 되찾으려는 가톨릭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서임을 받으려고 했다

여기에 대한 가톨릭의 반응은 놀랍도록 치밀한 계책이었다

참주들 요구를 들어주면서, 도시마다 두오모문화권을 만들게 했다. 도시 한 가운데 성당을 짓게 하고, 주변에 광장을 만들고, 관공서와 상가가 들어서게 했다

성당을 구심점으로 결속을 다지게 했다. 그렇게 되니까 개인의 창조성을 억압하고, 합리적인 사유를 하지 못하게 했던 가톨릭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꼴이 되고 말았다

유럽의 여러 도시가, ‘두오모중심 문화권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 이 때문이었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대 문명의 선구는 중세 르네상스였다는 여론이 지배적인 가운데 피렌체와 밀라노에서는 르네상스 맹아를 고대 로마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정신을 이어받은 필리포 비스콘티(1392~1447) 가문이 그들이었다

피렌체 서기장 살루타티(1331~1406)도 키케로의 서간문을 도입하고 로마의 공화정이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이 크게 열린 시대였다면서 카이사르와 같은 독재자에게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면서 공화정을 권장했다

내가 미완의 르네상스 기행에 나서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근대 문명의 선구를 중세에서 고대 로마로 되돌려 놓기만 한다면, 예수가 문명 디자이너였다는 가설에 논리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러니까 카이사르 암살과 예수 십자가 처형은 문명시대 여명기 먹구름이었다는 혼란스러운 시국 상황에서 거론 되어야 한다는 논리적 근거가 확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카이사르 암살은 개인의 생사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재발의 여지가 있는 악성 종양 덩어리였다

반문명적, 반인륜적 범죄가 급증할 것이라는 불행의 전조였고, 무고한 예수 십자가 처형을 비롯하여 중세 유럽 마녀사냥으로 이어졌다

(동영상에서 계속됩니다.)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선생님 여행길에 따라나선 밀라노 여행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요즌 건강하게 잘 지내시지요? 열심히 글을 쓰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마음도 흐뭇합니다.
늘편안하고 보람 되세요.

김춘봉님의 댓글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저는 중동 취업을 여러 번 한 근로자였습니다. 
취업 중에도, <미완의 르네상스> 글을 쓰면서, 로마를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여행사를 하면서 소원 성취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속담을 실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