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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말과 글의 되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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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2건 조회 620회 작성일 23-04-03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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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의 되새김


새삼스럽게 말과 글을 생각한다. 본디 같은 뿌리이지만 생각이나 느낌을 혀(舌)를 통해 소리로 나타내면 말(言)이 되고, 손끝을 통해 글자로 풀어내면 글(文)이다. 이들은 부리는 이의 인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투명한 거울로서 천(千)의 얼굴 다양한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는 단초가 되거나 씻을 수 없는 재앙이나 화를 불러오는 원흉이 되기도 한다.


말과 글은 화자(話者)나 필자(筆者)의 생각이나 철학이 곧이곧대로 투영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곧바로 그들의 품위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들 때문에 설화(舌禍) • 필화(筆禍)를 겪으며 고초를 당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 없이 사라졌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옛날에는 이들로 인한 다툼으로 화가 미칠 위기에 직면하면 사실 무근이라고 딱 잡아 떼거나 글의 맥락이 왜곡되었다고 둘러 대며 발뺌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늘날 각종 디지털 매체에 표정은 물론이고 숨소리를 비롯해 글의 경우 토씨 하나까지 원문(元文) 그대로 녹화되어 궁색하게 변명을 하는 비루한 꼬락서니가 되레 측은하고 인격이나 됨됨이까지 바로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어렵고 힘든 세월엔 언행을 매우 조심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는가 보다. 그렇지만 그릇의 크기에 비해 과도하게 이루거나 하찮은 권력이라도 손에 쥐면 말과 글은 거칠어져 정제되지 않은 채 마구 쏟아내게 마련이었던가. 그런 경우를 상정해서 맹자가 진심장구(盡心章句)를 통해 경고했던가 보다. ‘궁하다고 의를 저버리지 말고(窮不失義), 뜻을 이뤘다고 도를 벗어나지 말라(達不離道)’ 라고. 또한  그 옛날 중국의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통일할 때까지 흥망했던 10나라 중에 ‘다섯 왕조(後唐 • 後梁 • 後周 • 後晉 • 後漢) 여덟 성씨(姓氏) 열 한명의 군주(五朝八姓十一君)’를 모셨던 정승인 풍도(馮道)는 이런 설시(舌詩)를 남기면서 경고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조선시대 폭군 연산이 만들었던 신언패(愼言牌)*에 이 시구(詩句)가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 같은 말의 주요성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르는 신구의(身口意) 3업(三業) 중에서 구업(口業)이 가장 큰 업이라고 일깨웠는가 보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니(舌是斬身刀)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閉口深藏舌)

어디에 머물던 일신이 평안하리라(安身處處牢)


말과 글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일지 모른다. 곰곰이 생각할 때 두드러진 차이가 엄연히 존재한다. 말이란 그때그때 생각에 따라 입으로 내뱉는 관계로 감정이 격하거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 경우 본의와 다르게 튀어나올 개연성 때문에 거친 표현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도 도를 넘거나 패륜적인 언사가 허용되지 않아 설화를 겪었던 경우가 수없이 많다. 말에 비해 문자로 풀어내는 글은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퇴고(推敲)를 통해 지나치거나 부적합한 내용 걸러낼 수 있다. 다툼의 소지가 다분한 편파적인 글을 거리낌 없이 발표해 놓고 궁지에 몰리면 악의적 왜곡 혹은 편집 운운하며 군색(窘塞)하게 책임을 회피하려 기를 쓴다. 그렇게 말이나 글 갈망을 제대로 못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이기죽대는 책상물림들을 보면 역겨워 구역질이 절로 난다.


엎질러진 물처럼 한 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이나 공표된 글은 다시 거둬들일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신분의 높고 낮음, 배움의 많고 적음, 빈부의 차이를 막론하고 모두가 신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 말이나 한 줄의 글이 누군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아픔이나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아울러 언젠가는 그들이 부메랑이 되어 자기 자신을 꽁꽁 옭아맬 포승줄이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겠다.


정치적이거나 신념적인 연유가 아니면 됨됨이나 성품이 출중한 이들이 화를 겪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보통 사려가 깊지 못하고 충동적인 측면이 강해 세류에 휩쓸려 아부를 일삼거나 치졸한 부류들이 권력의 맛에 도취되거나 경박한 부(富) 앞에서 기고만장해 배설하듯 함부로 쏟아낼 때 설화나 필화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몇 해 전부터 정치인들이나 언필칭 학자들이 무분별하게 쏟아냈던 말과 글에서 그런 예를 하도 많이 봐오며 면역이 생겨 웬만해서는 눈도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무뎌진 신경을 치료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


* 신언패(愼言牌) : 조선시대 폭군 연산이 자기를 험담하는 신하들이 많다는 것을 눈치 채고  신하들에게 나무로 만든 패(牌)를 목에 걸고 다니도록 명을 내린 패이다. 이 패에 새겨진 글귀가 바로 ‘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인데, 이렇게 신하들 입에 재갈을 단단히 물림으로써 폭군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월간문학, 2023년 4월호(Vol. 650), 2023년 4월 1일

(2022년 12월 21일 수요일)       

댓글목록

장은초님의 댓글

장은초 작성일

참 공감가는 글입니다.  과거 자신이 싸질러놓은 말갈망을 못해 요즘  O적O 라는 말이 유행이지요. '아무개의 적은 아무개' 라고 말이예요.

선생님, 잘 계시는지요? 오랜만에 컴퓨터를 켰습니다. 이곳은 꽃보라가 내리고 있습니다.

참 선생님  이 문장에 오타가 하나 보여요.
사실무근이라고 딱 잡이(아)떼거나

김춘봉님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생각이나 느낌을 혀(舌)를 통해 소리로 나타내면 말(言)이 되고, 손끝을 통해 글자로 풀어내면 글(文)이다.”
이 대목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
저는 그동안 인식의 경계를 넓히려고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누구나 생각한다. 그렇지만 누구나 똑 같이 ‘잘’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미셸’과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공저 <생각의 탄생>에서 읽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말도 했습니다.
“기존의 말이나 다른 기호들(추측컨대 수학적인 것들)은 이차적인 것들이다. 심상이 먼저 나타나서 내가 그것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된 다음에야, 말이나 기호가 필요한 것이다.”
말과 글, 그리고 생각에 대한 제 소견을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