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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뜬다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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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1건 조회 419회 작성일 23-08-1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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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다리에서

윤복순

 

약문회 번개미팅으로 지난 목요일 군산에서 만났다. 서울에서 3, 대전에서 1, 광주에서 1, 익산 2명 군산 2명이다. 서푼 주고 집 사고 만 냥 주고 이웃 산다고 했던가. 그녀들이 온다 해서 군산의 선배가 보고 싶어 미련 없이 약국 문을 닫았다. 도착시간 보다 빨리 익산 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군산은 처음인 사람이 많아 선배가 며칠 전부터 불볕더위에 고생을 하셨다.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고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서 식당이며 문화유산 등을 둘러보신 것 같다.

나도 군산은 여러 번이지만 그날 처음 본 곳이 많다. 그중 뜬다리는 뜻밖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고장의 쌀을 군산을 통해 가져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현장을 그날 보았다.

뜬다리(부잔교)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의 특징을 살려 물에서 뜰 수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로 정박시설을 건설한 다음 부두에서 정박시설까지 다리를 만들어 밀물과 썰물시 상하로 움직이도록 한 선착장 시설물이다. 그 일부가 남아있다.

일제가 전라도 곡창지역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송출하기 위하여 뜬다리를 제3차 축항공사기간(1926~1933)3기를 설치하여 3000톤급 기선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후 3기가 추가 되어 6기가 사용 되었다. 현재는 3기만 남았다.

진포해양테마공원(위봉함) 근데 미술관 근대역사박물관 등을 둘러보았다. 군산은 익산에서 30여분 거리다. 회 먹으러 둘레길 걸으러 채만식문학관을 보러 여러 번 갔지만 정작 역사의 현장을 보러 간 적은 없어 전북도민으로서 조금 창피한 마음이었다.

 

일본 이시카와현과 전라북도는 자매결연이고 가나자와시와 전주시가 자매도시이다. 덕분에 나도 가나자와에 가 보았다. 한일여성친선협회 전북회원으로 격년으로 오고 간다. 올해는 우리가 9월에 일본에 간다. 그들이 가나자와에 윤봉길의사의 순국선열비와 암장지가 있다고 알려줘 추모행사를 하러 간다.

윤의사는 소년 때 일본 식민지 교육에 압증을 느껴 자진 퇴학 후 서당 서숙에서 공부를 하고 귀농운동에 정열을 태웠다.

그 뒤 광복을 위해 중국에 망명, 19324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왕 생일과 상해 점령 전승기념 축하행사가 열렸을 때 폭탄을 투척했다. 일본군 대장과 일본 거류민 단장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고위층들도 많은 부상을 당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망했다.

윤의사는 자결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일본군에 체포된다. 즉시 공개 처형될 예정이었지만 그의 순국이 알려지면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에 일본은 교도소에 구금한다.

중국 국민당 장개석 총통이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극찬했고 이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해외만방에 대한민국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가혹한 고문 끝에 5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우편수송선을 타고 오사카 위수형무소로 후송되고 약 한 달간 그곳에 수감된 후 19321219740분 가나자와 9사단 육군형무소 공병작업장에서 총살당했다. 그때 나이 25세였다.

유해는 일제에 의해 비밀 암장됐고 묘비도 봉분도 없었다.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 가는 길이라서 13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녔다. 재일동포 200여명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묘지를 발견했다. 독립과 더불어 194636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그때 유골 208개중 7개를 찾지 못했다. 손뼈 등으로 고문으로 상했을 수도 있으나 소나무 뿌리 속에서 없어졌을 수도 있어 암장터는 유골이 남아 있으니 또 다른 윤의사의 묘이다.

순국선열비는 상해 의거 60주년을 맞아 세워졌다. 그 당시 일본인들의 반대가 심해 순조롭지 않았으나 가나자와 시장의 묵언이 있어 가능했다고 한다. 그 터는 영구 임대한 상태다.

일본 회원들이 나도 모르는 윤봉길의사 순국선열비와 암장터를 알려주고 추모행사를 할 수 있게 준비해주는 것은 물론 윤의사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

나도 오래 전 상해 임시정부와 홍구공원에서 윤의사에 대한 설명은 들었지만 어느새 다 잊고 지냈다. 그곳 방명록에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적었다. 매년 광복절을 맞으면서도 특별히 윤의사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가나자와에 순국선열비와 암장지가 있다고 해 이번 참에 상세히 알아보았다. 윤의사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에 울컥울컥하는 감동이 있었다. 내 마음의 본바탕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일본 방문은 문화교류 외에 윤봉길의사 추모행사라는 큰 의미가 있다. 그 행사를 위해 흰색 한복도 맞췄다. 헌향 헌화 추모사 외에 추모공연도 한다. 너무 늦게 찾아가서 지금까지 모르고 있어서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다.


선배는 나의 이런 마음을 어찌 알고 근대사거리를 구경시켜줬을까. 잼버리 대회가 열릴 새만금이나 고군산열도를 구경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 일행은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은 세대다. 책으로만 배웠지 몸으로는 모른다.

왜 째보선창이라 하는지도 이번에 알았다. Y자로 살짝 째진 강안에 석축을 쌓아 조성한 포구라서, 또 이곳에 힘센 째보가 살았는데 부둣가에서 날품팔이나 노점을 차리려면 그에게 자릿세를 상납해야 해서 생긴 이름이란다. 1920년대부터 부르기 시작했는데, 소설 탁류의 주인공 정주사가 강 건너 용댕이(서천)에서 식솔들을 데리고 째보선창 부두에 첫발을 내디딘 시기도 그때쯤이다. 소설 아리랑에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보름이가 서무룡의 도움으로 떡장수를 시작한 곳도 째보선창이란다.

약사문인회 군산모임으로 군산의 다른 한쪽을 보았다.

 

2023.8.3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대학재학 시절 군산이 고향인 친구들을 찾았을 때, 몇 차례 군산을 구경했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아련할 뿐 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수탈해  수송하던 전진 기지이며 잡산지의 흔적인 창고가 매우 인상적이던 생각이 떠오르네요. 선생님의 글을 감상하며 잊고 지냈던 암울한 우리 역사였던 일제감점기의 여러 사실들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