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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공경을 받지 못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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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2건 조회 398회 작성일 23-08-2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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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을 받지 못할지라도 


요즘 아내의 병원 출입이 무척 잦다. 안쓰러워 짐짓 무심한 척 딴청을 부리기 일쑤이다. 집에 머물 때 병원 다녀오겠다고 하면 “알았어!”라고 대꾸하는 게 고작이다. 또한 병원을 다녀왔다고 하면 “응~ 다녀왔어!” 라는 식으로 의례적인 단답(單答)으로 마지못해 응하는 꼴이다. 게다가 눈을 마주치고 “왜 가느냐?” 혹은 “어떤 치료를 받았으며 상태는 어땠는지?” 따위에 도통 관심이 없다는 투로 일관한다. 아내를 무시한다거나 싫고 짜증이 나서가 아니다. ‘겁이 나서 피하고 싶은 퇴행적인 행동’일 따름이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아내가 서러워 할 만큼 매정한 척 행동하는 게 내 자신도 싫다.


기축생(己丑生)으로 고희(古稀)의 중반 언저리를 지날 뿐인데 최근 몇 년 사이 아내의 건강은 생각보다 심한 내리막으로 치닫는 것 같다. 뜻하지 않은 담낭 절제로 병원과 결별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난해부터는 무릎과 척추협착증 때문에 병원을 자주 찾아 걱정이다. 전문 지식이 없어 제대로 꿰뚫지 못하지만 “뼈 주사”에 “무릎에 물이 차거나 통증에 관련된 주사”를 수시로 맞는가 하면 ‘물리치료’도 자주 받는다. 그렇다고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그런 쪽에 좋다는 수영에 엎어져 지낸지 어언 40년쯤 지났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가정을 이뤄 동행한지 올해로 47년째이다. 중신아비이며 바로 위 오빠인 김 박사와 부모님의 협박(?)에 마지못해 등 떠밀려 혼인했던가 보다. 따라서 중국의 후한(後漢) 시절 양홍(梁鴻)의 인품을 흠모해 혼인했던 맹광(孟光)과는 다른 이유에서 혼인했지만 커다란 풍파 없이 반듯하게 가정을 이뤘다. 여태까지 삶처럼 앞으로도 큰 병이나 변고가 비껴갔으면 좋으련만 터무니없는 야무진 꿈이며 욕심일까. 젊은 날은 되레 내가 크고 작은 병고와 친한 듯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반대로 되는 게 아닌가하는 우려가 앞선다. 맘대로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고나 병고는 내게 지워졌으면 좋겠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사이다. 욕심 같아서는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험한 꼴 당하지 않고 삶을 영위하다가 품위를 지키며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이유에서 부부가 함께 보건소에 가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까지 작성해 두었다. 이런 곡진한 바람이 올곧게 이뤄졌으면 좋으련만 뜻대로 될지 모르겠다.


얼추 10년이 넘었지 싶다. 아내가 걷는데 부담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집안의 쓰레기(음식물, 재활용, 생활폐기물) 버리는 것은 통째로 내 몫이 되었다. 한편 시장이나 마트에서 생활용품을 구입한 짐 꾸러미나 박스를 싣고 지하 주차장에에 도착해서 “나 지하에 도착했어!”라는 전화를 하면 “응! 알았어!”라고 답한 뒤 득달같이 달려가서 집으로 옮기는 것도 묵시적으로 합의된 내 일이다. 왜냐하면 무거운 것을 들고 걸으면 무리가 따라 탈이 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다가 앞에서 등장했던 양홍과 맹광의 일화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후한서(後漢書)인 양홍전(梁鴻傳)의 대략적인 내용의 간추림이다.


후한 시절 청빈하지만 인품이 곧고 처세가 원만해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던 양홍(梁鴻)은 이런저런 이유로 혼인을 미룬 채 미혼일 때 같은 동네에 살며 나이가 많고 박색이었던 맹광(孟光)이라는 규수가 그를 매우 흠모했던가보다. 그런 이유에서 “자기는 훌륭한 인품을 지닌 양홍이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다고 한사코 버틴다는 소문”을 들었다.


맹광에 대한 풍문에 끌려 관심을 보이다가 둘은 결국 연이 닿아 혼인을 했다. 그렇게 혼인을 하고나서도 양홍은 아내인 맹광과 동침하지 않았다. 괴이하게 생각하고 그 연유를 물었는데 남편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원하는 아내는 비단옷에 화려한 치장을 한 여인네가 아니라 누더기를 걸치고 산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지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당당한 여자”라고 일갈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맹광은 화려한 옷과 얼굴 꾸미기를 멀리한 채 시골 아낙처럼 생활했다. 이에 따라 생겨난 말이 그 유명한 형처(荊妻)*이지 싶다.


가정을 이룬 양홍은 생업인 농사일 중간 틈틈이 시(詩)를 지어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그런 시 중 일부에 황실을 비난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게 빌미가 되어 나라에서 체포령이 떨어지면서 환멸을 느낀 그는 즉시 오(吳)나라로 피신해 명문가인 고백통(皐伯通)의 방앗간지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연을 담아 엮어낸 양홍전(梁鴻傳)에 이런 구절(句節)이 있다. “양홍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내인 맹광은 한결같이 밥상을 차려 감히 눈을 치뜨지 않고 (밥상을) 눈썹 위까지 들어 올려 바쳤다(每歸妻爲具食不敢於鴻前仰視擧眼齊眉)”고. 여기서 “밥상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바침”을 뜻하는 “거안제미(擧案齊眉)”라는 표현에 대해 특히 유념할 필요가 있지 싶다. “지아비를 얼마나 존경했으면 매일 삼시 세끼 올리는 밥상을 눈썹 높이까지 들어 올렸을까”라는 대목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도 남는다. 이런 부부의 됨됨이를 예사롭게 넘기지 않던 고백통(皐伯通)은 음양으로 그들을 돌봐주어 양홍이 수많은 저술을 남길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우리 부부의 얘기이다. 과년한 처지에 혼인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같잖은 핑계를 대며 세월을 축내다가 벼랑 끝 궁지로 몰려 백기를 들고 혼인을 택했다는 아내이다. 썩 내키지 않았기에 그 옛날 맹광이 양홍을 섬겼다던 공경과는 거리가 상태에서 간택된 지아비로 시작했을지라도 큰 허물없이 함께했던 지난 세월을 돌아볼 때 아름답고 보람되었던 따뜻한 날들이 훨씬 많고 행복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부부는 오그랑장사가 아닌 큰 이문이 남는 멋진 장사를 한 셈이다. 이런 생을 마칠 때는 아내가 나보다는 단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한다는 게 일관된 내 지론이다. 왜냐하면 아내가 없는 텅 빈 집안에서 스스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 구질구질하고 궁상스런 비참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자존심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아내보다 네 해 앞서 이 세상에 왔기에 한 발이라도 앞서 이승을 하직하는 게 행운이고 순리로서 아귀가 맞는다고 여기고 있다. 이런 바람을 위해 아내의 건강이 나를 능가하면서 평탄하기를 빌고 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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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처(荊妻) : 열녀전(列女傳)에 나오며 후한(後漢) 시절 양홍(梁鴻)의 아내인 맹광(孟光)이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 치마를 입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마음의 일기를 꺼내다, 한국수필가연대 100인 대표수필선, 2023년 7월 17일

(2022년 5월 8일 일요일)



댓글목록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사모님이 늘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건강을 되찾을 무언가 좋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교수님의 바람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김춘봉님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제 나이 30이었을 때였습니다.
공사판을 전전하는 신세라서 결혼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때였습니다. 
20 꽃다운 나이에 저를 구제해 준 아내는 분명 행운의 여신이었습니다. 

저는 사지가 멀쩡한 데,
당뇨가 있는 아내는 가끔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사모님께서도 건강 회복하시고, 평안한 삶 누리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