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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노비와 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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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0건 조회 162회 작성일 23-11-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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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와 머슴


얼핏 생각하면 서로 닮은꼴일지라도 그렇다고 단정하기엔 찜찜한 노비와 머슴의 차이 얘기다. 원래 맡았던 일이 어렵고 힘든 육체적 단순노동이었다는 관점에서 외형적으로 비슷할지 모른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실제로 ‘노비(奴婢)’는 높고 낮음을 뜻하는 신분적인 계층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이에 비하여 ‘머슴’은 직업의 한 유형으로서 경제적인 사상에 바탕을 두고 생성된 것으로 오늘날 연봉제의 효시(嚆矢)인 셈이었다.


노비(奴婢)를 순 우리말로 ‘종’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내종’을 ‘노(奴)’, ‘계집종’을 ‘비(婢)’라고 했으며 양자를 통틀어 ‘노비’라고 호칭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비의 신분은 세습되었고, 물건처럼 매매의 대상이었으며, 생사여탈권은 무조건 주인에게 주어져 있었다. 한편 노비의 갈래는 태생이 노비인 자(者), 빚을 진 자, 나쁜 일을 한 자, 전쟁 포로, 자매(自賣)*를 한 자 따위로 분류할 수 있다.


노비 종류의 대략적인 간추림이다. 먼저 나라의 다양한 관청이나 지방의 관아에 예속된  공노비(公奴婢)이다. 다음으로 개인의 소유로 개인적인 일이나 가정사를 맡았던 사노비(私奴婢)이다. 그리고 사찰의 일을 하던 사노비(寺奴婢)이다. 끝으로 각종 향교나 서원의 일을 했던 원노비(院奴婢)가 있다.


노비 구분 방법이다. 우선 노비가 독립된 호(戶)를 구성 여부에 따라 솔거노비(率居奴婢)와 외거노비(外居奴婢)로 나눈다. 이때 솔거노비는 ‘주인의 호(戶)에 적(籍)을 두고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가내노비’이다. 그리고 외거노비는 ‘주인의 호와 다른 호를 세워서 그곳에 적을 두고 주인의 영지에서 농사를 짓던 노비’이다. 다음으로 사역 즉 신공(身貢)* 형태에 따라 입역노비(入役奴婢) 혹은 앙역노비(仰役奴婢)와 납공노비(納貢奴婢)로 나눴다. 한편 입역노비(앙역노비)는 직접 몸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를 말한다. 아울러 돈이나 물건으로 일종의 몸값을 지불하는 노비가 납공노비이다. 이들 납공노비는 소속기관이나 상전에 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생활하는 대신에 반드시 신공을 받쳐야 했다.


노비에 대한 법은 무척 엄격했다.  첫째로 원칙적으로 노비끼리만 혼인하라는 동색혼(同色婚)을 법으로 정했다. 둘째로 양민과 노비의 교혼(交婚) 즉 양천교혼(良賤交婚)을 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셋째로 부모 중에 어는 한 쪽이 천민(賤民)이면 그들의 모든 자녀는 천인으로 규정하는 일천즉천(一賤則賤) 법칙을 엄히 적용했다. 넷째로 자녀의 소유나 신분이 어머니에 의해 결정되는 종모법(從母法)을 적용했다. 또한 다섯째로 자녀의 신분이 아버지에 의해 결정되는 종부법(從父法)을 적용하기도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게 마련이던가. 조선시대 노비가 합법적으로 양인(良人)으로 속신(贖身)* 할 수 있는 길인 종양제도(從良制度)가 있었다. 그 예이다. 우선 노비가 군사적으로 공을 세워 면천(免賤) 되거나 모반사건 따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양인이 되는 법이 공로면천(功勞免賤) 혹은 군공종량(軍功從良)이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재산을 축적하여 나라에 헌납해 노비의 신분으로부터 면천하나거나 자신의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대신하게 하는 법인 납속종량(納粟從良)이 시행되었다.


머슴은 노비와 근본적으로 뿌리가 다른 개념이다. 이들은 신분이 높고 낮음에 따라 상놈 • 상것 • 상민 따위로 불리며 천대받던 노비가 결코 아니다. 가정 형편이 곤궁하다는 경제적 이유로 ‘새경’*이라는 연봉(年俸)을 받고 일정기간 고용되는 사람이 머슴이다. 다만 머슴은 연봉인 ‘새경’의 정도를 비롯해 노동 조건 따위를 주인과 마주하고 협상하여 요구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고용계약이 성립하기 때문에 노비와 견줌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머슴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주인과 동등한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어떤 속박이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인이 된다. 이런 이유에서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는 노비와는 비교할 수 없다.


원래 머슴은 ‘농가나 양반의 집에 고용되어 농사일을 비롯해서 잡일 같은 허드렛일을 해주고 대가를 받는 사내(남자)’를 뜻한다. 결국 머슴은 자본주의 사상이 잉태하기 시작했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생긴 직업군(職業群)이다. 그들은 임금노동자로서 연봉인 ‘새경’을 받고 전속계약을 맺었던 효시에 해당한다. 그 옛날 공 • 사노비(公 • 私奴婢)를 막론하고 관이나 주인에게 예속되어 원천적으로 머슴이 될 수 없었다. 그런 때문에 양인(良人)들이 자발적으로 근로계약을 맺고 부잣집에 들어가 급여와 숙식을 제공받았던 제도의 산물이었다. 일반적으로 동지(冬至)에 연봉인 ‘새경’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피고용인으로서 신분은 양인(良人)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이 가세가 기울어진 명문가 출신들도 머슴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이유이었으리라. 주인댁 사람들과 머슴 사이의 호칭이나 대접도 노비와는 격과 결이 다른 대접을 받았다. 하나의 예이다. 머슴이 꽤나 많던 시절 그들의 수고에 위로하고 새로 다가오는 봄철 농사 준비를 격려하기 위해 음력 2월 1일을 머슴날 • 일꾼날 • 노비일(奴婢日)로 정했다. 그날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마련하여 대접하며 즐기도록 배려하는 세시풍속까지 생겨났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먹는 음식 대접에서도 배곯지 말라는 뜻의 인정을 듬뿍 담은 머슴밥 혹은 고봉(高峯)밥 문화도 정착했었다.


노비들이 이승의 삶을 마칠 때까지 의식주 문제에서부터 삶에 관련되는 모든 문제의 책임은 주인에게 있었다. 이는 주인의 입장에서 좋은 점도 있지만 무한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무거운 짐이 되기도 했다. 물론 노비들 입장에서는 자기 뜻과 관계없이 태어난 세상이 싫고 섧고 떫었을 게 자명하다. 이들의 처지에 비해 머슴은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구속이나 의무 조항이 완전히 소멸되기 때문에 고용자와 피고용인(머슴) 모두에게 득이 된다. 또한 이런 장점을 이용하여 주인은 필요한 기간만 고용하는 경영 마인드(mind)를 살릴 수 있고, 머슴의 입장에서는 계약이 만료된 자유로운 시기에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점(利點)도 있었으리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비들은 자유가 없고, 성(姓)이 없었으며, 신분은 세습되는 폐단이 있었고, 매매가 가능했으며, 생사여탈 권한이 깡그리 주인에게 있었던 처참한 존재였다. 이들에 비해서 계약 노동자인 머슴은 일정기간 피고용인으로서 의무를 다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즘 젊은이들이 툭하면 직장에 대한 불만으로 ‘현대판 노비’라고 한탄한다는 얘기를 내뱉어 무척 당혹스럽다. 언제 자신들의 신분이 천민으로 추락해 생사여탈권을 고용자에게 넘겨주었는지 당최 헷갈린다. 무심결에 쏟아내는 언어의 유희라지만 자고로 ‘아 다르고 어 다르다(於異阿異)’라고 했거늘 과도한 자기 비하는 피하는 게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키는 첩경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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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매(自賣) : 조선 후기에 계속되던 흉년으로 연명할 길이 없는 평민들이 자신이나 처자를 노비로 파는 경우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노예로 팔려갔던 경우다.

* 신공(身貢) : 조선시대 노비가 신역(身役)* 대신에 삼베나 무명, 모시, 쌀, 돈 따위를 납부하던 세(稅)를 말한다.

* 신역(身役) : 나라에서 성인 장정에게 부과하던 군역(軍役)과 부역(賦役)이다.

* 속신(贖身) 혹은 속량(贖良) : 어떤 대가를 치르고 천인(賤人)의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良人)이 되는 것을 뜻한다.

* 새경 : 머슴이 주인에게서 한 해 동안 일한 대가로 받는 돈이나 물건. 유의어로 보수 또는 사경이 있다.


문학공간, 2023년 10월호(통권 407호), 2023년 10월 1일

(2023년 3월 9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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