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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행정가 티베리우스 삶과 고뇌(4) > 자유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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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위대한 행정가 티베리우스 삶과 고뇌(4)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춘봉 댓글 2건 조회 34회 작성일 24-05-0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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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 https://youtu.be/--WM78TVO-0?si=tZwvlkDn0o8rLhFA


역사 속으로 묻힌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터무니없는 오해에 대해서 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카이사르 암살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옥타비아누스가 대권을 물러 받았다는 오해가 성립될 수 있었던 네 개의 변수에 대해서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첫 번째 변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자기도 암살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암살범들에게 관용과 포용 수혜자가 되게 한 실수였습니다.

두 번째 변수는 카이사르 암살 주범이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원로원이 자기들을 무시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니까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필리피 전투에서 겁먹은 옥타비아누스가 도망 다니기 바빴는데도 불구하고 승리한 것처럼 거짓 선전했습니다.

세 번째 변수는 시동생을 시켜서 옥타비아누스를 죽이려다가 되레 쫒기는 신세가 된 풀비아가 객사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옥타비아누스는 유명세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변수는 기원전31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지원군을 전달할 것처럼 악티움 곶으로 오게 하고는 뒤통수를 치는 수법으로 안토니우스를 파멸시킨 다음 내전을 종식시킨 것처럼 거짓 선전을 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가 위대한 영웅으로 추대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옥타비아누스 배후 세력이었던 마이케나스와 호라티우스는 여러 차례 허위사실을 유포하면서 제정로마 기틀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옥타비아누스를 정략결혼에 이용하면서 권세를 누렸습니다.

기원전4917, 원로원은 최종권고라는 이상한 공문을 갈리아 총독 카이사르에게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군단을 해산하고 귀국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대권을 부여받은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의 최종권고에 따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당신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게 될 것입니다.”

메시지를 보내기에 앞서, 원로원은 시리아에 있던 폼페이우스를 로마로 오게 해서, 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기원전73, 검투사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발란을 일으킨 이후카푸아에 상주하고 있는 2개 군단 병력을 로마 가까운 곳으로 이동할 것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도 폼페이우스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지 않았고 군대를 이동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최종권고공문을 받은 다음 해 112,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넜습니다. 그러자 117일 폼페이우스가 제일 먼저 로마를 떠났습니다. 자기가 로마에 있으면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음날, 집정관 마르켈루스와 렌툴루스를 비롯하여, 보수파 의원들과 그들에게 딸린 가족들로 구성된 피난 행렬이 아피아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길게 이어졌습니다.

225, 폼페이우스는 남쪽 브린디시까지 후퇴했다가 317, 바다 건너 그리스로 가 버렸습니다. 폼페이우스를 만나려고 뒤따라갔던 카이사르가 19, 로마로 되돌아와서 불안해하는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자신의 별장에 숨어 있던 키케로를 찾아가서 회담 아닌 회담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특별한 관직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들이 피난을 갔기 때문에 유명무실해진 민중회의를 소집하고, 선거인단을 구성한 다음 독재관이 되었습니다. 그 후, 카이사르는 민중파라는 오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독재관은 집정관을 대신할 수 있는 위기관리 체제의 행정수반이었습니다.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는 관용과 포용정신에 입각한 정책을 발표하고 주조화폐를 발행했습니다. 고리대금업을 하던 원로원 의원들이 돈을 모조리 가지고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듬해, 원로원 의원들이 하나 둘 돌아오면서 다시금 집정관에 입후보해서 당선되었습니다.

그 해 1213, 폼페이우스를 만날 요량으로 로마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원로원 보수 세력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폼페이우스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2년 후(BC47), 카이사르는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지 않으면 올바른 정치를 펼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정치범들에 대한 보복성 폭력 근절을 막기 위하여 새 법도 만들었습니다.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국외 추방으로 대신했습니다.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살생부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공황 상태가 되면, 사람들은 일신상의 안전만 도모하게 된다면서, 공황 상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 조치를 강구했습니다.

이처럼 개혁을 단행하면서도 카이사르는 사석이나 공석이나 가리지 않고, 폼페이우스에 대한 평가를 신중하게 했습니다. 단 한 번도 폼페이우스를 적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를 함정에 빠뜨려서 제거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폼페이우스 역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카이사르와의 정면충돌을 피했습니다. 몇 번의 교전이 있을 때마다 불필요한 병력 손실을 막으려고 후퇴하니까 병사들이 카이사르 쪽으로 도망가면서 폼페이우스는 망명지를 찾아 다녀야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를 망명지로 생각하고 친서를 보냈습니다. 자신을 비롯하여 가족과 일행을 손님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 당시 이집트는 11세 클레오파트라와 동생(7)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린 남매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습니다.

폼페이우스가 타고 온 5단층 갤리선이 부두 가까이 왔을 때 이집트 왕이 보낸 작은 거룻배가 다가왔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집정관 렌툴루스와 경호원 몇 명을 데리고 옮겨 탔습니다. 거룻배에는 그리스인 아킬라스와 예전에 폼페이우스 밑에서 백인대장을 지낸 셉티무스가 병사 몇 명과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5단층 갤리선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거룻배가 육지를 향해서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셉티무스가 폼페이우스 가까이 가서는 비수로 찔렀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앞으로 고꾸라졌습니다. 폼페이우스와 함께 간 다른 사람들도 연이어 칼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5단층 갤리선 사람들이 급히 닻을 올려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폼페이우스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카이사르가 이집트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항아리에 담긴 폼페이우스의 머리와 금반지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죽이고 칭찬을 듣고 싶어 하던 나이 어린 이집트 왕을 남쪽 어딘가로 추방하고, 참모들이 셉티무스를 알아서 처리하라고 맡겼습니다. 관용과 포용 정신을 강조하던 카이사르였지만, 폼페이우스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겁니다.

그 당시 히스파니아에 있던 폼페이우스 장남 그나이우스와 차남 섹스투스는 카이사르에게 결사항쟁으로 맞서겠다면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카이사르의 적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장남은 히스파니아 남부지방의 문다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BC45). 차남 섹스투스는 도망 다니다가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니까 패잔병들을 규합하여 반군을 만들고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 세 지역을 점거하고 독자적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그런데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옥차비아누스 책사가 된 마이케나스는 섹스투스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정치적 술수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스크리보니아는 죽은 그나이우스의 장인 되는 사람의 누이였습니다. 마이케나스는 그녀와 옥타비아누스를 결혼(BC40)시켜, 그녀로 하여금 섹스투스와 연락을 닿게 한 다음, 옥타비아누스로 하여금 섹스투스와 평화협정을 맺게 했습니다.

미세놈에서 섹스투스와 만난 옥타비아누스는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의 통치권을 양도한다는 협정을 맺고 헤어졌습니다(BC39). 이탈리아 반도 서쪽 티레니아 바다 해상권을 전부 양도한다는 협정이었습니다.

이처럼 섹스투스와 거짓 평화 협정을 맺고, 마이케나스는 옥타비아누스로 하여금 알렉산드리아 마크 안토니에게, 섹스투스가 해적질을 한다면서 전함을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해적을 소탕하고 함대를 돌려보내면서 2만여 병력도 함께 보낸다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120척의 전함과 병력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함대사령관은 티베리우스클라우디우스 네로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함대사령관을 수도 로마로 오게 하고, 그 대신 마르쿠스 아그립바를 보내 섹스투스와 싸우게 했습니다.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섹스투스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 다니다가 소아시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소속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섹스투스가 죽으니까 옥타비아누스는 이용 가치가 없어진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함대사령관 아내 리비아()와 다시 결혼했습니다(BC38)

그렇게 되니까 120척의 전함을 가지고 왔던 함대사령관은 졸지에 전함을 빼앗기고, 부인도 빼앗기는 기가 막히고 절통한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재혼할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25세였고, 리비아는 20세였습니다. 전남편과 아들 티베리우스(4)가 있었고, 임신 7개월이라서 눈에 드러날 정도로 티가 났습니다.

그런데도 리비아는 전남편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재혼을 했습니다.

여기에는 흥정을 붙이는 거간꾼이 있었고, 그 당시 20세였던 리비아에게도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습니다.

리비아는 사내아이(드루수스)가 태어나기 무섭게 전 남편에게 보낸 때만 하더라도 옥타비아누스 핏줄을 생산할 수 있다고 자만에 빠져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가니까 전남편이 죽고 고아가 된 여덟 살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4)를 오라고 했을 때 리비아의 꿍꿍이속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 중에 있었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참모였던 티베리우스 생부가 아내로부터 이혼당하면서 함대사령관 직을 스스로 포기한 것처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오른팔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다가 또 다른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습니다.

파르티아 원정을 핑계 삼아, 카이사르가 책정한 군비를 안토니우스가 가로챘다면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았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고, 안토니우스가 작성해서 베스타 신전에 맡겨놓았다는 거짓 유언장도 공개했습니다(BC34).

풀비아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율루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에게서 태어난 두 딸에게는 유산을 한 푼도 주지 말 것.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아이들에게만 줄 것. 내가 죽으면 시신을 로마에 가져가지 말고, 알렉산드리아에 묻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처럼 반역자 누명을 씌우는 정치적 음모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곶으로 갔다가 참패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계속)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건강하시고 평안하시지요?

김춘봉님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글 쓰기에 열중한 나머지 스트레스가 쌓여서 <간 수치>가 위험 단계에 와 있습니다. 
두 달 넘도록 약을 복용 중인데, 피로감은  여전합니다. 
입원을 생각 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