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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오래전 아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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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임영숙 댓글 4건 조회 1,017회 작성일 20-07-0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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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아침 이야기


종일 내린 비 덕분에 하늘도 바람도 상큼하다. 밤새 내리는 빗소리를 듣다가 잠을 설쳤지만, 마음은 즐겁다. 기분을 살리려 핑크빛 앙상블을 차려입고 출근을 한다. 버스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 와 주었고 스타킹을 신지 않은 맨다리에 스치는 바람이 청량한 아침이다. 이어폰으로 음악 방송을 들으며 흥에 겨워 버스에 오른다. 집 앞 정류장에서 갈아타는 곳까지 만원 버스로 가야 한다.

전철로 갈아타는 역에서 많은 사람이 내리면 되도록 밖이 잘 보이는 창 쪽 좌석을 골라 앉는다. 거리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아침을 만들고 나도 그들처럼 하루의 시작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한다.

! 안경을 쓰지 않고 나왔다. 미간에 힘을 주어 초점을 모아 버스가 지나는 풍경을 세세하게 살폈다. 하루쯤은 안경을 벗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인생 공부가 된다. 안경을 써야 보이는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좀 흐릿해도 그곳에는 같은 세상이 존재할 것이니까.

젊은 여자가 길을 걷고 있다. 허리가 불편한지, 노인처럼 허리가 굽어 있었다. 불편한 허리로 여자의 걸음은 돌이 갓 지난 아기 걸음걸이 같았다. 여자를 보며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반듯한 몸을 가지고 살면서도 얼마나 많은 불평으로 살았는지 마음 한구석에 부끄러움이 차올랐다.

뒷좌석 젊은 남자가 전화로 말다툼을 한다. 아내와 인 듯 젊은 남자가 전화를 끊으면 전화벨이 다시 울리고 전화를 받은 남자는 쌍시옷 들어간 말을 몇 마디 하면 상대편이 전화를 끊는지 남자가 다시 전화를 걸며 몇 정류장을 오도록 다툼은 계속되었다. 다툴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지금 행복하다는 것을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라디오 진행자가 사연을 소개한다. 서로 이해하지 못해 헤어진 연인 중 한 사람인 모양이다. 좀 이해해 줄 걸 후회가 된다는 헤어진 다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립다는 글이었다. 사랑은 이기적이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결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 결점을 덮어 주고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함께 한다고 다 사랑으로 여기지만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희생이 따라야 하고 명예나 물질로 평가하지 않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는 물기를 머금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돕고 있다. 오랜만에 내린 비로 사람들 마음이 모두 촉촉해진 듯 싱그러워 보인다. 메말랐던 산 둔덕의 나무들이 시들어 뽑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계절마다 찬란한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와 꽃으로 단장한 예쁜 소공원에 젊은 여인이 겨울 외투를 입고 커다란 가방 서너 개를 옆에 놓고 찢어진 우산을 쓰고 벤치에 앉아 있다. 그 여인을 보면서 감사하다. 힘들고 어려운 일에도 맨탈 강하게 사회의 구성원으로 어미로 살아가는 내가 기특하고 대견하여 스스로 칭찬하는 아침이다.

어느 저택의 정원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가득하다. 자귀나무의 공작 깃털 같은 분홍색 꽃이 피어 있고, 공원의 울타리로 심기어진 조팝나무에도 작디작은 흰 꽃들이 만발했다. 소공원의 나무들도 오랜만에 맛본 단비 때문인지 어제와는 다른 빛깔로 행인에게 인사를 한다. 드디어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했다.

정류장 횡단보도에 초등학교 녹색 어머니회에서 아이들 등교 길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재잘거리며 길을 걷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찰랑댄다. 어제 내린 비로 아이들 마음에도 맑은 냇물이 졸졸 흐르는 모양이다.

먼지 날리던 모래 운동장도 빗물을 머금은 채 사그락대며 어릴 적 양지바른 산자락에서 밟았던 사금파리 조각 감촉처럼 내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아침마다 같은 시간에 같은 거리를 버스로 달리며 살아 있음을 한 번도 감사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밤새워 내린 비로 인하여 마음이 촉촉해지기 때문인지 유난히 가슴 벅차고 따뜻한 아침을 보냈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나는 여전히 아침이면 버스를 기다리고 갈아타 일터에 나온다. 어느 것 하나 잊지 않고 살길 바라지만, 우리는 가슴에 레터의 강을 안은 채 살고 있다. 오늘 건넌 이 아침은 내일로 이어질 것이며 오늘을 소중하게 살아야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댓글목록

해들임님의 댓글

해들임 작성일

'오래전 이야기지만 나는 여전히 아침이면 버스를 기다리고 갈아타 일터에 나온다. 어느 것 하나 잊지 않고 살길 바라지만, 우리는 가슴에 레터의 강을 안은 채 살고 있다. 오늘 건넌 이 아침은 내일로 이어질 것이며 오늘을 소중하게 살아야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살아 숨쉬는 모든 게 선물입니다.
자주 글 좀 올려주세요.^^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평소에 무심코 지나쳤을지 모르는 소소한 삶의 편린들에서 삶의 이유나 가치들을 새삼스레 느꼈을 그 아침 어쩌면 평이로운 나날이, 삶이 아름답고 존귀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게 행복이 아닐까요.  끝 무렵 귀절에 마음을 묶어 둡니다.

"아침마다 같은 시간에 같은 거리를 버스로 달리며 살아 있음을 한 번도 감사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밤새워 내린 비로 인하여 마음이 촉촉해지기 때문인지 유난히 가슴 벅차고 따뜻한 아침을 보냈다. "

임영숙님의 댓글의 댓글

임영숙 작성일

감사합니다.
부지런하지 못 하여 오래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남창우님의 댓글

남창우 작성일

좋은 글 잘 읽었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