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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눈물 찔끔거리는 버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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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2건 조회 921회 작성일 22-01-25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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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찔끔거리는 버릇


주책없이 눈시울을 붉히거나 눈물을 찔끔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초등학교 이후 부모님의 슬하를 떠나 타향살이를 하면서 외롭고 슬퍼도 청승 떨지 않으려고 스스로 독려했다. 지독한 결기 때문이었던지 젊은 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었을까. 슬픈 사연을 듣거나 볼 때,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애절한 노래, 애달픈 드라마 따위를 대할라치면 평상심을 잃고 눈물을 질질거려 민망한 경우가 흔해졌다. 비슷한 나이 때문일까. 내외가 함께 TV를 시청하다가 그런 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처구니가 없어 휴지를 찾으려면 아내도 마찬가지 상황인 경우가 태반이다. 쑥스러워져 뻘쭘한 마음에 눈길을 피한 채 싱긋 웃음 짓는 것으로 어색해진 사태를 수습한다.


육남매 중에 세 번째인 외아들로 태어나 여자 형제들 틈에서 딴에는 외롭게 자랐다. 그에 연유했을까. 초등학교 시절 누군가와 다툼이나 사소한 싸움 뒤에 형이나 동생들이 떼 지어 나서서 편을 들어 옹호해 주던 친구들이 몹시 부럽고 샘이 났다. 그때 여자 형제뿐이기 때문에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견지에서 합리적인 타협이 지고지선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가치관이 지배했던 때문이었을까. 여태까지 누군가와 크게 싸우거나 심하게 다투다가 크게 틀어져 사이가 멀어졌던 적이 별로 없다.


중학교 시절 3년 내내 족대부(族大父) 댁에서 생활했다. 백발에 전형적인 선비풍이었던 족대부가 어려워 집안에서는 늘 언행을 조신하게 했던 때문에 큰소리를 내거나 허튼 행동을 멀리했다. 내 행동거지를 눈여겨 지켜봤던가. 바로 옆집에 살던 우리학교 한문 선생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덕담을 해주셨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타향을 전전할 때 매일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이나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오를 때면 왠지 모를 외로움과 막연한 설움에 울컥해지기 일쑤였다. 알량한 자존심이었을까. 그런 난감한 순간에 누군가에게 나약한 속내를 온새미로 들키기 싫어 밖으로 티를 내지 않으려 무진장 애를 썼다. 그렇지만 낯 설고 물 설은 타향을 떠돌면서 적지 않게 진한 가슴앓이를 하면서 아린 아픔을 곱씹었지 싶다.


고등학교는 청주에서 다녔다.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가정을 이루어 신혼생활 중에 두 아이를 얻으며 내 집(강남의 도곡동과 대치동)을 마련하여 둥지를 틀고 15년(1965~1980) 동안 서울에서 거주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일터가 마산으로 정해지면서 가족 모두가 옮겨온 지 41년째(1980~2021)이다.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까닭일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가능한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심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마음은 여전하다. 그래서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울 때면 속으로 아픔을 삭이는 버릇이 습관화 되었다. 이런 처사가 너무 버거워 때로는 곧이곧대로 드러내고 실컷 통곡이라도 하고픈 충동이 일지만 용기가 없다.


얼추 35~36년 전의 아픈 상처이다. 그해(1986) 이른 봄 장모님 생신을 챙기겠다고 두 아이와 서울의 친정에 갔던 아내가 갑자기 배가 아파 K대학교 혜화동 병원 응급실에 입원해 검사결과 ‘장 폐색’으로 밝혀졌다. 그로 인해 50여 일을 입원해 3회에 걸쳐 개복 수술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 때 어린 아이들과 마산에서 생활하면서 학교에 나가 강의하고 나서 매주 주말이면 입원했던 아내의 병실을 찾았었다.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암담한 상황에서 한 번은 12살 위인 손위 동서 집에 찾아가 후련할 때까지 마음껏 울어재꼈다. 아마도 내 생에서 가장 크게 많이 울었던 것으로 회상된다. 그렇게 했음에도 참으로 모를 일이다. 불효하게도 막상 내 부모님이 별세를 했을 때는 아픔과 설움을 속으로 삭이며 겉으로 드러내 곡을 피하려 노력했다. 두 분 모두 장례식장을 꺼려했던 시절 아파트에서 운명하셔서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가능한 삼갔다.


올해가 결혼 46년째로서 우리는 서로 많이 달랐다. 나는 을유생(乙酉生)이고 아내는 기축생(己丑生)이다. 내가 컴퓨터공학을 공부한데 비해 아내의 전공은 그림이라서 서로의 전공 분야에 대해 까막눈이다. 내가 걷기운동을 선호하는데 비해 아내는 수영에 모두걸기를 하고 있다. 나는 채소를 즐기는 편인데 아내는 육식을 좋아한다. 아내는 이지적이며 끈질긴 성격이지만 나는 충동적이고 급하게 설치는 편이다. 이처럼 우리는 각론의 관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배움이나 취향이 사뭇 다른 둘이 가정을 꾸리며 지난 세월 다소 덜컹대거나 삐걱거렸을지라도 커다란 흠이나 무리하지 않는 이인삼각 행보를 하고 있지 싶다.


부부는 서로 닮아가게 마련이던가.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지만 사회적인 견해나 가치관에서 결을 같이하는 취향이나 성격으로 바뀌었다. 즐겨 찾는 음식이 비슷해지고 좋아하는 노래의 장르가 일치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TV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성향까지 서로 엇비슷해져 이제는 리모컨(remote controller) 쟁탈전이 필요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애절한 노랫가락이나 드라마의 애절한 장면이나 구구절절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할 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물을 짓는 버릇까지 판박이처럼 빼닮아 가고 있다. 가정을 꾸린 이후 여태까지 애오라지 한곳을 지향하며 걸어온 이인삼각의 여정에서 당연한 귀결일까 아니면 세월이 지나며 나약해진 영혼끼리 이어진 이심전심의 공명(共鳴)이련가. 오늘 아침 꽃등부터 내외가 “엄마의 봄날”이라는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할머니의 활처럼 굽은 허리와 다리가 아파 어기적거리며 힘든 농사일을 하는 모습을 보며 안쓰러워 혀를 끌끌 차며 진하게 가슴앓이를 했다. 이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시나브로 생각의 결을 서로 닮아가는 우리는 황혼녘에 접어든 지금 고희의 강을 건너서 산수(傘壽)를 향해 휘적휘적 다가가는 생의 동반자이다.


문학공간, 2021년 11월호(통권 384호), 2021년 11월 1일
(2021년 9월 26일 일요일)


댓글목록

장은초님의 댓글

장은초 작성일

선생님 사모님과  다복하게 노년을 보내시는 모습이 참 흐뭇합니다.
우리 남편은 한번도 우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제가 사이보그라고  하지요.
저는 남자든 여자든 울고 싶을 때 우는 게 인간적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 수필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테마수필 단톡방에서 주인없이 나그네들만 축하인사를 드렸네요. ㅎㅎ
선생님의 창작 열정을 뉘라서 흉내를 낼 수 있을까요?

선생님 설날 잘 보내시고 늘 건강하십시오^^

김언홍님의 댓글

김언홍 작성일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감동깊게 읽었습니다.
비록 태어나 자란곳은 달라도 결국은 한곳을 향해 가는것이 부부가 아닐런지요.
외국인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중에 한국인은 무뚝뚝해서 늘 화가 나있는것 같다고 말한답니다.
그 무뚝뚝함 속에 얼마나 깊은 정이 숨어있는지 , 우리는 알지요.
모든 한국의 남편들 또한 그렇습니다.
글 읽는 내내 사모님에 대한 교수님의 그런 마음이 느껴졌어요.
내외분 항상 행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