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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다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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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언홍 댓글 1건 조회 778회 작성일 22-02-0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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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락방

 

                                                 김언홍

 

  소리 없이 내린 간밤의 눈은 나무밑둥치에 그 흔적이 미미하고, 갑자기 불어 닥친 영하권 날씨에 움츠린 낙엽들만 담가에 옹기종기하다. 어디선가 바람이 자꾸 불어온다. 때 이른 춘풍인가 아니면 가기 싫어 미적거리는 늦겨울 바람인가. 희끗거리는 눈발이 시나브로 날리는 아침, 단체로 날아온 산 까치가 산수나무울타리에 앉아 청회색의 날개를 퍼덕거린다. 찬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있던 강아지의 귀가 곤두선다. 멀뚱히 올려다보는 강아지의 눈. 오래전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눈길처럼 허공을 더듬고 있다.

  좁고 긴 안방 아랫목에 발을 한껏 올려야만 오를 수 있었던 다락방이 있었다. 힘을 잔뜩 줘야만 열리던 다락방 미닫이문 네 짝에 붙여진 민화에선 탱화보다 더 울긋불긋한 꽃이 피고 새가 날았다.

할아버지가 오랜 병환으로 그 아랫목에 누워계셨다. 바깥출입이 어려웠던 할아버지에겐 그 그림을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을 것이다. 소담스런 목단을 바라볼 땐 눈이 아득했고 매화가지 끝에 앉은 새를 보며 지나간 시절의 봄을 그리워 하셨을 것이다.

  이웃 집 처마가 닿을 듯 창가에 내려와 있던 그 어둡고 침침했던 방은 오랫동안 겨울이었다.

  건넛방에 앉아있으면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마루를 건너왔고, 목청이 컸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마루를 건너가면 할아버지는 이마에 주름을 잔뜩 모으시곤 하셨다. 그 할아버지가 인생의 긴 여정을 끝내고 떠나시던 날, 비로소 활짝 열린 다락방에서 숨어있던 냄새들이 구물구물 기어 나왔다. 할아버지가 쓰시던 장죽과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은 쾌쾌 묵은 갓, 빛이 바랜 지팡이 등이 비로소 어둠에서 해방 되었다.

  디귿자 한옥 집이었던 다락에 올라 마당을 내려다보면 이웃집 지붕 끝에 맞닿은 하늘이 길게 사각으로 내려왔고, 담 끝에서 멈춰버린 마당도 사각이었다. 그 긴 직사각 마당 끝에 놓인 수돗가에는 늘 물이 찰랑거렸다. 물이라도 넘쳐야 복이 들어온다는 할머니만의 믿지 못할 믿음이 늘 찰랑댔다. 아픈 할아버지를 위해 할머니는 달마다 그 먼 관악산 절까지 버스를 갈아타가며 찾아가 기도를 올리곤 했지만, 빈방에 홀로 누어 밤길을 떠나신 할아버지는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한 채 먼 길을 떠나가셨다. 긴 세월 할아버지가 그 방안에서 바라본 세상은 다락문에 붙여진 민화 넉 장이 다였다. 할아버지의 영혼은 어디로 가셨을까. 새가 울고 목련이 피는 낙원을 찾아 가셨을까. 이승에서 못 누린 봄날의 추억을 따라 꽃 피는 들판을 따라 가셨을까. 세월은 저 만치 달아나 돌아올 줄 모르는데 뒤늦은 춘설에 하얀 눈송이가 잡을 수 없는 영혼처럼 팔랑 거린다

  지나간 것은 그립다. 그 어둡던 방의 기억도, 다락방도, 할아버지의 길고 하얀 수염도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글에서 나타난 "매화"라는 단어가 눈에 띄면서 갑자기 아래와 같은 글귀가 떠 올라 옮겨 봅니다. 아직은 맹취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머지 않아 따스한 봄이 다가 오겠지요.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을 팔지 않는다.’는 뜻의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라는 일깨움에서, 요즘 같지 않은 책상물림인 지식인들이 정치판에서 얼굴을 디밀고 매명을 하는 역겨운 꼴이 연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