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드림출판사

세월이 간다 > 자유창작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고객센터
상담시간 : 오전 09:00 ~ 오후: 05:30
(주말 및 공휴일 휴무)
02.2612-5552
FAX:02.2688.5568

b3fd9ab59d168c7d4b7f2025f8741ecc_1583557247_0788.jpg 

수필 세월이 간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판암 댓글 3건 조회 1,139회 작성일 22-02-22 07:32

본문

세월이 간다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어제에 비해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오늘이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시나브로 쌓이면 상황은 달라진다. 따라서 십여 년 전 내 모습은 오늘의 내가 아니고, 오늘의 나는 십여 년 뒤의 내가 아니리라. 같은 이치로 며칠 전의 행동이나 모습은 기억의 곳간에 생생하게 갈무리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난 옛일은 가물가물하거나 까마득해 도통 기억이 없다. 순간순간이 단절되는 게 아니라 영원히 이어진다. 그렇지만 아무리 현재를 붙들고 지난날을 당겨 되살려 보고파 발버둥 쳐도 오래된 옛 기억은 깜깜할 뿐 쓸데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비탈진 개울가에 앉아 도란도란 흘러가는 물은 언제 봐도 어제 봤던 물은 없다. 늘 새로운 물이 흐를 따름이다. 쉼 없이 물이 흐르는 까닭에 옛것과 현재의 것을 구별하는 짓은 부질없다. 왜냐하면 흐르며 뒤섞여 앞뒤 것을 가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편의에 따라 네 편과 내 편으로 나뉘거나 흑묘백묘(黑猫白描)로 가름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 번 어우러진 물은 그 시원(始原)이나 성분 따위로 일목요연하게 명확히 구분할 방법이 거의 없다. 또한 물은 한데 혼합되면 화학적인 융합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람의 경우는 사상이나 철학이 다른 상태에서 한데 뭉칠 때 외형적으로는 통합의 모습을 보여도 내면적인 융합 즉 유기적 결합은 거의 불가능하다.


세월은 유수 같다 했던가? 어저께 젊음을 받쳤던 일터에서 물러난 것 같은데 벌써 12년의 고개를 넘보고 있다. 그동안 늘 맘속으로는 하나도 변한 게 없다고 믿어왔다. 역으로 얘기하면 모든 것은 예 그대로라고 객기를 부리고 있었다는 얘기가 성립된다. 인정하기 싫지만 세월을 실감하는 게 하나있다. 일터에서 내려왔을 무렵에는 매일 오가는 등산길에서 추월당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뒤에서 따라와 앞지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이다. 이는 걷는 속도가 날이 갈수록 점점 느려졌음을 방증하는 징표이다. 어제도 등산길에서 여남은 명을 앞세우고 나서 묘하게 쓸쓸해진 기분을 조곤조곤 곱씹었다.


바람과 세월은 닮은 구석이 있다.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로 가는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데 우선 공통점을 지녔다. 한편 끊임없이 흘러가는 세월이나 쉼 없이 스쳐 지나는 존재가 바람이다. 그렇지만 그 생김새를 눈으로 확인하거나 손으로 만져 실체를 인지할 수 없다는 면에서도 닮은꼴이 틀림없다. 그런가 하면 잔잔하고 부드럽고 따스한 모습의 바람이 있다. 이에 비해서 토네이도(tornado)나 태풍으로 변해 세상을 휩쓸며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원흉이 되는 매정한 구석도 엄연히 존재한다. 세월 또한 태평성대의 자상한 모습을 보이다가 엄청난 재해나 전쟁으로 휘몰아 어두운 질곡의 터널로 몰아넣는 잔혹한 면도 있다. 항상 대하는 바람과 세월이련만 어제의 바람과 시간은 아무리 찾아봐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오늘도 허둥대면서도 그들과 어깨동무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그 모습이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어 짝사랑일 뿐이다.


세월과 구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길을 간다는 맥락에서 공통분모를 가진 셈이다.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질시나 반목, 전쟁과 다툼을 비롯해 천재지변이 발발해도 세월은 오로지 제 길을 묵묵히 갈 따름이다. 한편 하늘을 떠도는 무애도사 같은 멋쟁이 구름 역시 높은 산이나 태풍이 앞을 가로막기도 한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비범한 기개 또한 세월과 같은 모양새가 아닐까. 이들에 비해 세상을 올곧게 살겠다고 다짐했었던 내 삶은 어땠을까.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좌고우면하며 피할 방법이나 면피의 명분 찾기에 급급했던 남우세스러운 행동이 드러나지 않은 내 진면목일 게다. 그런 연유에서 여태까지 살면서 뚜렷하게 이룬 게 전혀 없는 밋밋한 삶이 그를 증명하는 증좌이지 싶다.


언제 황혼의 언저리까지 왔을까. 어쩌다 보니 이번 달 지나면 희수(喜壽)의 강을 건너 일흔여덟에 들어선다. 나름 열심히 살려 했건만 터무니없는 욕심에 매달려 허송세월하다가 어느 결에 백두옹(白頭翁)에 이르렀다. 끝끝내 변변히 건진 게 없어 한편으로는 민망하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허전하기 짝이 없다. 세월이나 바람과 구름은 허접한 욕심이나 연(緣)에 얽매이지 않고 굳세게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세상 이 구석 저 구석을 기웃거리다 세월만 보낸 채 지동지서하며 황혼녘에 이른 지금까지 휘청대고 있는 꼴이다. 그럼에도 야속한 세월은 오늘도 여전히 흐트러짐이나 빈틈을 보이지 않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수필과 비평, 2022년 월간 제31권 제2호(통권 244), 2022년 2월 1일
(2021년 12월 4일 토요일)
 

댓글목록

박래여님의 댓글

박래여 작성일

요즘 제 마음이 그래요. 선생님 ㅋ
얼마나 더 세월 가는 것을 보게 될까.
그런 마음이 자꾸 들어요.ㅋ

장은초님의 댓글

장은초 작성일

선생님, 세월이 간다는 게 무덤덤한 저보다는 선생님의 기상이 훨씬 젊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이 고맙게 여겨지니까요.
나훈아 노래 <고장난 벽시계> 가사처럼, 고장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하듯
세월은 묵묵히 제 갈길길 가는 게 보이고 느껴도 집니다.
세월에 속아 산다는 것도 젊을 때의  일이고요.
선생님, 수필집 잘 읽고 있습니다.
남녘에는 홍매화가 핀다던데 이곳은 아직 동토의 땅입니다.
선생님, 환절기 건강 조심하세요^^

해드림출판사님의 댓글

해드림출판사 작성일

언제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수님

교수님, 아직 청춘인 거 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