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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이 찡찡한 아쉬움이 컸던 켈수스 도서관 > 자유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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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뒤끝이 찡찡한 아쉬움이 컸던 켈수스 도서관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춘봉 댓글 2건 조회 559회 작성일 23-01-30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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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 https://youtu.be/BXYl7wOJOR4

 

트로이 관광을 마치고 이동 중에 일정표를 보니까, 트로이에서는 2시간 30분 관광을 했고, 버스로 5시간 이동 후 에페수스에 도착했습니다.

식당애서 늦은 정심을 먹고, 다시 버스에 탑승하니까 가이드가 남은 일정을 조목조목 알려주었습니다.

에페수스 유적 대부분은 뷸뷸 산과 파나이르 산 계곡 평원에 있습니다.”

기원전 18세기경 히타이트 시대 이후, 그리스 시대, 페르시아 시대, 로마 시대, 비잔틴 시대, 셀주크 시대 유적이 뒤섞여 있습니다.”

“6세기 초, 대지진과 우마이아 왕조의 이슬람 약탈로 폐허가 되었다가 근세에 와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1923년 터키 정부가 문화재 반출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었습니다.”

에페수스 관광 하이라이트는 예지(叡智), 덕성(德性), 사려(思慮), 학술(學術)과 같은 인성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켈수스 도서관입니다.”

도서관은 소아시아 총독이었던 켈수스(AD60~130)가 사망하기 3년 전이었던 서기127년 착공하고, 부친이 남긴 유산과 유언에 따라 아들이 서기135완공했습니다.”

완공 후 127년이 되던 해(AD262), 유럽의 동게르만 고트족 침입 당시, 누군가의 방화로 도서관의 책들이 모두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에페수스 유적지 남쪽 매표소로 가는 중입니다. 버스에서 내리면 완만한 언덕을 걸으면서 명소를 둘러보고, 북쪽 매표소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본 다음, 다시 버스로 2시간30분 거리 파묵깔레 호텔에 투숙하면 오늘의 일정이 모두 끝납니다.”

  

가이드의 안내로 우리는 바리우스 욕장, 오데온 소극장, 고대 관청건물, 폴리오의 샘, 승리의 니케여신 부조, 헤라클레스 문, 매년 성스러운 불을 지키는 사제들이 지나갔다는 쿠레테스 거리, 고대 공중화장실, 고대 주택지와 켈수스 도서관을 본 다음, 아고라 상가 지역과 유곽, 그리고 켈수스 도서관에서 대극장으로 이어지는 대리석 대로를 걸으면서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갔습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은 세 번에 걸쳐 복원공사를 했다는 가이드 말이 무색할 정도로 황량한 폐허 그 자체였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482~565)가 서기537년 이스탄불에 거대한 지하궁전을 신축하면서 이곳 석재를 모두 가져갔기 때문에 돌기둥 127개 중에서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어서 유적 복원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에페수스에서 5시간 관광을 한 다음, 파묵깔레로 가는 동안 나는 일상사가 되어버린 노트북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텍스트 파일을 수정하는 작업은 가능했습니다.

역사물을 소재로 글을 쓰는 작가에게 있어서, 노트북과 인터넷 검색은 <굽으로 땅을 치며 달리는 말 위에 오른 격>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는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지식 담론으로 '세상은 왜 이런 가?'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처럼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고대 철학자들과 후대 철학자들을 언제, 어디서든 만나 열띤 토론도 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인으로 꼽히는 아이작 뉴턴이 말했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서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우리들로 하여금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설 수 있게 해줍니다.

나는 그동안 인터넷 검색으로 사고(思考)의 영역을 넓혀 왔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구성원이고, 이성(理性)을 본질로 하는 합리적 존재입니다. 이성을 지렛대로 삼으면 스스로의 생각을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생각은 어디서 오는 가?

이성과 감성(感性)의 경계에서 옵니다.

감성은 자극에 반응하고, 이성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작동합니다.

이성과 감성을 구분할 수 있게 되면 논리적 사고의 틀이 확장됩니다. 그러면 역사적 사실들이 일반화 되면서 필연성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와 터키 패키기 여행을 나서기 전부터 인터넷 검색으로 <켈수스 도서관> 자료를 확보해 놓고 있었습니다.

도서관을 설립한 켈수스는 <로마 도시문명>에 대해서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가 쓴 참된 가르침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원시기독교 시절, 그러니까 가톨릭이 말하는 총대주교 시절이었던 서기177년에서 80년 사이에 켈수스가 참된 가르침을 발표했습니다.

서기53, 기독교의 창시자 바울이 에페수스에서 전도를 시작했고, 그가 쓴 갈라디아서, 고린도 전서와 출처불명 신원미상의 작가가 쓴 요한복음서가 나온 다음이었습니다.

에페수스는 바울 선교의 요충지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7교회도 이 무렵 생겨났다고 추정합니다.

고대 로마의 법학자였던 켈수스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는 신생 기독교에 대해서 경각심을 고취시키려고 참된 가르침을 발표했습니다.

사람들이 미신에 빠져들지 않게 하려고, 인성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도서관도 설립했다고 봐야 합니다.

켈수스를 애서가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는 저술가였습니다.

사법해설이 있고, “법은 정선(正善)과 형평(衡平)의 수단이다.” 명언도 남겼습니다.

법률의 전부를 보지 않고 그 일부에만 의거해서 판결하거나 해답하는 것은 법률가로서의 큰 오류이다. 법률을 안다는 것은 그 용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의와 적용을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공격하면서 켈수스가 예수를 어떤 식으로 평가했는가가 나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서기262년 도서관 방화로 참된 가르침원본이 소실되고 없는데도 불구하고 100여 년 동안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니까,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오리게네스(185~254)켈수스에 대한 반론을 발표하면서 논쟁의 불씨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켈수스에 대한 반론이 궁금하면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시면 됩니다.

 

참된 가르침을 복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리게네스의 켈수스에 대한 반론을 역추적하면서 1846년 야크만에 의해 편집되었으며 1873년 카임이라는 학자에 의해 복원되었습니다.

240개 항목으로 된 글은 부활한 그리스도미신과 예수는 관련이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켈수스가 어떤 입장이었는지 알 수 있는 다섯 문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독교 진리는 보편적 철학에서도 능히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예수는 자신의 거룩한 사명을 확신하지도 않았고, 성경의 기적과 같은 사건들은 허구적인 이야기이고, 설사 그런 것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이집트인들의 주술적 전승들을 수용한 것일 뿐이다.

셋째, 기독교인들은 그들 자신 안에서도 결속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그 안에는 수많은 섹트(분파)와 차이점이 있고, 기독교인들은 지혜와 선도 없고, 무지하며, 죄인들이다.

넷째, 기독교의 가르침은 고유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 철학의 플라톤, 헤라클리투스, 소크라테스 그리고 다른 철학자들에게서 차용한 것이다.

다섯째, 기독교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주관하려는 헛된 희망을 버리고, 사회와 분리된 삶을 포기하고, 제국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말과 믿음과 행동을 보여야 한다.

 

켈수스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고대 철학자와 선인들 가르침을 재인용 혹은 와전시킨 것이고 예수의 기적은 속임수와 주술적 행위에 불과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선한 의도가 왜곡된 것은 아닐까? 너무 안타깝다는 말밖에 나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생존 당시 로마는 - 문명시대 여명기의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지중해 절대 강자였던 로마는 포용과 관용의 정신을 발휘하면서 인류공동의 번영과 평화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정점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시대의 표적><시대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한심한 자들이 카이사르 암살을 자행하면서 로마는 도약의 발판을 잃고 역사적 퇴행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역사적 퇴행은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였습니다. 병원균이 유대 속주에까지 미치면서 문명에 대해서 말한 예수를 십자가상에서 죽게 한 서기30년 골고다 사건으로 비화되었습니다.


예수 사건은 복잡하게 꼬인 인물과, 현실상으로는 말이 될 수 없는 상황 설정 등, 매우 자극적인 장면이 드러난, 막장 드라마였습니다. 예수는 무심결에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 다락방에 갔습니다. 그것이 비극의 단초였습니다.

다락방은 이단자들 비밀 아지트였습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예수는 급히 감남 산에 가서 숨었습니다. 다락방에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수는 현행범으로 체포될 수 있었습니다.

다락방 출입은 어디까지나 치안유지 차원에서의 일탈 행위였습니다.

가롯유다가 원로사제 안나스에게 고발하지 않았다면,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경미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를 신문하게 된 안나스가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제자들과 너의 교훈에 대하여 말하라."

예수는 회당과 성전에서도 은밀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하면서도 제자들과 다락방에 가게 된 경위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락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장담하건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락방에서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주재했다는 이야기는 바울이 지어 낸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 “

고린도전서는 서기55년 말에서 56년 초,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예수 살아생전에는 코빼기도 보이지도 않던 바울이, 예수가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주재한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서기65년에서 70년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가복음 14장에, <최후의 만찬>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기85년에서 90년경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태복음 26장과 누가복음 22장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기80년에서 90년에 나온 요한복음에는 떡과 포도주 이야기 대신, 예수가 제자들 발을 씻어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바울의 거짓말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신약성경이 확정된 서기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 전까지, 바울의 서간문과 사도행전은 이단 서적으로 분류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바울의 거짓말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켈수스가 몰랐을까요?

나는 에페수스 관광 이후에도 뒤끝이 찡찡한 아쉬움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글을 계속해서 쓰고 있는 중이랍니다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한번 정독을 했지만, 바탕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읽으니, 글자를 읽는 정도를 넘을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시대 그 곳의 역사를 먼저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선 시간을 내서 천천히 반복해 정독해 새겨 보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김춘봉님의 댓글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타고난 필력과 감성이 부족하고, 생소한 이야기를 하려니까 - ,
수시로 좌절과 침체에 빠지곤 합니다.
평안한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