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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글 백제왕궁박물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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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복순 댓글 2건 조회 428회 작성일 23-02-0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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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궁박물관에서

윤복순

 

익산에 눈이 내렸다. 대설에 한파까지. 조심스러워 일요일 여행할 엄두를 못 냈다. 집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미륵사지박물관을 갈까 왕궁박물관을 갈까 행복한 고민을 하다 왕궁을 택했다. 우리 집에 손님이 오면 모시고 가는 곳은 미륵사지다. 일요일 미륵사지까지 걸어갔다 오기도 한다.

왕궁박물관은 오랜만이다. 초기에 가보고 이번이 두 번째다. 2008년 개관 시에는 왕궁리유적전시관 이었는데 2021년 백제왕궁박물관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공주의 공산성,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부여 왕릉원, 정림사지, 나성, 익산의 미륵사지, 왕궁유적 8곳이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다.

박물관여행은 해설을 듣지 않으면 수박 겉핥기 밖에 되지 않는다. 나같이 아는 것이 없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다행히 해설가가 동행해 주었다.

익산은 문화도시로 지정받았다. 백제의 수도였다고 알고 있는데 무왕 몇 년에 천도했고 몇 년 동안 수도였는지는 확실하게 모른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그런 내용이 없다.

서동의 생가 터가 있고 쌍릉도 있다. 대왕릉은 무왕의 묘로 여러 분석결과 확인 되었고 소왕릉은 선화공주의 묘 일거라 추측된다.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얘기는 드라마로 방영되었고 드라마세트장도 익산에 있다. 매년 서동축제도 한다. 무왕 제임 기간이 41년 인데 몇 년이나 익산이 수도였을까.

무왕의 왕궁으로 추정되는 곳이 왕궁리유적지다. 왕궁의 외곽경계와 내부구조가 명확하게 확인된다. 처음부터 왕궁을 조성하기 위해 11, 21 비례로 공간을 분할했다. 정원석이나 수로 등 백제 최고의 정원임이 확인 되었다. 중국 정원석(어린석)이 발견되고 일본정원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왕궁 안에 공방을 두어 금 유리 동제품을 직접 생산했다. 삼국시대 최초 대형 화장실이 발견되었고 뒤처리용 막대 기생충알도 발견 되었다.

또 수도였다고 확인 되는 것은 오금산 토성에서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그 기와에 수부(首府)도장이 찍혀있다. 수부는 요샛말로 수도라는 뜻이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익산이 백제의 수도였음에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 관세음응험기에 정관 13년 지모밀지에 천도하여 정사를 신축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문제는 이 관세음응험기가 앞 13줄은 양무제 연호인 양천감인데 (502~519) 5줄은 당 태종 연호인 정관13(639)이 나온다. 120년 차이가 나니 사학자들 사이에선 신빙성이 없어 이론이 많다.

1965년 왕궁리 5층 석탑 보수공사를 하기 위해 해체해 보니 탑 아래 초석에 갖가지 칠보와 불사리수정병이 들어 있었다. 금니로 만든 금강반야경을 목칠함에 넣어 두었다는 내용이 관세음응험기에 나오는데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 관세음응험기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관세음응험기에 백제 무광왕이 정관 13년 기해(백제 무왕 40년 서기639) 겨울 11월 하늘에서 뇌성병력이 치며 비가 내려 제석정사의 불탑 황금부도 남방 등이 모두 불타버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현재는 왕궁 터가 절터로 바뀌었다.

익산에는 국보문화재가 4개 있다. 미륵사지석탑(1962년 지정),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 사리봉영기 사리함외호 내호 등(2018년 지정), 왕궁리 5층 석탑(1997년 지정), 5층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1966년 지정)등이다.

미륵사지 서탑 보수공사 때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는데 봉안기에 기해년(639) 탑지를 통해 사리를 봉안했음이 확인되었고, 사리봉영기에 우리 백제왕후는 좌편 사택적벽의 딸로 오랜 세월동안 선인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의 동량이 되셨다.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큰일 났다. 여태까지 선화공주가 무왕의 왕비라고 알고 있었는데 사택적벽의 딸이 왕비라니 모두가 깜짝 놀랐다. 서동왕자와 선화공주는 전설 속의 이야기였을까? 우리 집에 온 손님들에게 미륵사지 구경을 시킬 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혼란이 일었다.

해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왕은 왕비가 여럿 있을 수 있다. 왕비가 먼저 죽으면 다시 왕비를 맞이한다. 무왕이 41년 재임했으니 아마도 사택씨가 두 번째나 세 번째 왕비일지도 모른다.

대왕릉과 소왕릉을 발굴해 본 결과 소왕릉(왕비의 묘)이 먼저 만들어졌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니 선화공주가 무왕보다 먼저 돌아가신 것은 확실하다. 미륵사지 창건 당시의 왕비는 사택씨가 맞는 것 같다.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은 미륵사지 전시관에서 전시를 했다. 나도 구경을 갔다. 사리장엄도 내호 외호 사리 사리봉안기 등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려함과 정교함을 뭐라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국보급이라서 전시기간이 끝나고 미륵사지전시관에 못 두고 국립박물관으로 갔다.

미륵사지 석탑이 오랜 기간을 거쳐 고증을 통해 완전 보수될 때 사리장엄 일체가 서탑에 봉안되었다. 왕궁리 5층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도 탑 안에 봉안되었는지 궁금했다. 해설가는 영주 부석사에 있다고 한다. ? 그 당시 부석사에 불사가 있었고 그 이상은 모른단다.

불교문화재는 행정부 소관이 아니고 불교종단의 문제라고 한다. 미륵사지 사리장엄이 익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금산사의 큰 스님 입김이 많이 작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스님이 입적하셨다. 왕궁리 5층 석탑의 사리장엄이 익산으로 돌아오기는 요원할까.

사택씨가 왕후인 문제는 해결 됐는데 익산이 백제의 수도였다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엔 어찌 익산 천도에 관한 얘기가 한 줄도 안 나올까.

대단한 백제의 후손이라도 된 듯 백제인들의 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어보았다. 대설에 한파주의보까지 내려졌지만 내 마음은 오랜만에 익산의 국보들과 후끈후끈하다. 백제 박사가 된 것 같다.

 

2022.12.18

댓글목록

한판암님의 댓글

한판암 작성일

지난날 익산에 여러 차례 갔었는데, 주로 방문 목적지인 원광대학교만 갔다가 왔던 관계로 주위 유적이나 박물관에는 한 번도 가봤던 적이 없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백제의 역사를 더듬으며 유적지나 박물관을 찬찬히 살펴 봐야겠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통해 좋은 공부 많이 했습니다.

윤복순님의 댓글

윤복순 작성일

지난 일요일 (12일) 부여 나성과 왕릉원, 정림사지 등을 다녀 왔습니다.
아직도 익산이 백제의 수도였다는 확신은 없습니다.
익산에서 몇몇 선생들께 물으니 무왕시절 익산이 수도였다고 확신하는 사람도 있네요.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부여 왕릉원 입구에 역대 왕들을 연대별로 나열해 놨는데 익산 천도설 등은 한 줄도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