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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배달 의뢰인 미상의 난 화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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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판암 댓글 1건 조회 562회 작성일 23-02-06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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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 의뢰인 미상의 난 화분


그저께(11월 6일) 저녁 생각지도 않던 난 화분 하나가 배달되었다. 원래는 의뢰인이 내일(7일)에 배달해달라는 주문이었는데 꽃집 사정상 오늘 미리 배달해 미안하다는 얘기와 함께 말이다. 하지만 언제 누가 배달을 의뢰했는지 모르겠다며 주소와 이름을 비롯해 전화번호가 맞으니 우선 받아두면 연락이 올 것이라는 얘기에 못이기는 척하고 다소곳이 따랐다. 화분을 인수하고 오늘(8일)까지 누가 보냈는지 어림짐작하며 머리를 쥐어 짜 봐도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해서 두서없이 용의 선상에 떠오르는 지인들에게 슬며시 전화를 넣어 봐도 연신 헛다리만 짚어댈 뿐 여전히 미궁을 헤매며 낑낑대고 있다.


서양란 ‘만천홍’ 화분으로 6개의 꽃대에 싱그러운 보랏빛 꽃이 무척 소담스럽고 아름답게 주렁주렁 매달렸다. 화분을 장식한 두 개의 리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그 하나에는 나태주 시인의 3줄 시로 유명한 풀꽃 중에 앞의 두 줄 내용인 ‘자세히 보아도 예쁘다. 오래 보아도 사랑스럽다’가 적혀 있다*. 다른 하나의 리본에는 ‘두 분의 특별한 오늘, 행복한 동행을 빕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들 문구(文句)를 바탕으로 미루어 유추할 때 누군가 문학적 감성이 넘쳐나는 이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8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지난날을 헤아려보니 부부의 연을 맺은 지 마흔여덟 해째이지만 이제까지 가족 외에는 주위의 누군가로부터 이런 축하를 받았던 적이 없어 더더욱 생경할 뿐 더러 보내준 이를 기필코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다.


지난 10월은 유난히 일도 많았을 뿐 아니라 병원도 수없이 들락거려 얼이 빠질 정도였다. 그래서 11월이 되었다는 사실 조차도 의식하지 못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지 싶다. 부부가 함께 독감백신, 대상포진 백신, 동절기 코로나19 백신(5차 접종인 셈) 등을 접종했다. 게다가 나는 치아 6개를 발치(拔齒)하고 여기에다 이전에 발치했던 2개의 치아 등 모두 8개의 임플람트 시술을 위해 생쥐 풀 방구리 드나들듯 병원을 들락거리느라 초주검이 될 정도로 경(黥)을 치면서 한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이런 곤혹스런 나날을 보낸 때문에 내외 모두가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터였다. 


밖에서 지인들을 상대로 가정사 얘기는 입말에 올리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결혼기념일 얘기를 입에 올렸던 기억은 아무리 떠 올려도 도통 없다. 설사 떠벌려봤자 어느 누구도 귀담아 듣거나 기억해줄리 만무하다. 그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별난 존재가 아니었기에 여태까지 주위 지인들로부터 이런 축하를 받아봤던 경우가 전무해 더더욱 신기하고 화분의 배달 의뢰인의 실체가 몹시 궁금하다. 누가 어떤 경로를 통해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탐지했을까, 혹시 내가 썼던 수필 집 어딘가에서 그날을 적시했던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태까지 졸작(拙作)을 그러모아 펴낸 수필집이 17권이다. 그들 중 한 두 곳에서 언급했을지라도 그 날짜를 매구같이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며칠 뒤(12일) 몸담고 있는 문인협회의 계간지 출판 기념회가 열린다. 그 자리에서 말부조를 할 기회가 있다면 “배달 의뢰인 미상(未詳)의 난 화분” 얘기를 해 볼 요량이다. 어찌 생각하면 아름답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름 없는 필부(匹夫)로 살아온 삶을 있는 그대로 반추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이다. 또한 혹시라도 그 자리에 참여한 문우 중 누군가가 그 원흉(?)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뜻으로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고 이르지 않던가. 하기야 내 집은 마산인데 창원 중심가의 꽃집에 배달을 의뢰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마산과 창원의 사정에 어두운 타지에 거주하는 경우이지 싶기도 하다. 어찌되었던 평범한 삶을 누리던 터수로서 화분 하나에 벅찬 감동을 받은 단면을 더덜이 없이 표출하는 게 청자(聽者)들에게 진솔하게 공명할 수도 있기에 들려줘도 주책스럽게 투영되거나 부담되지 않을 것 같다.


모자라는 처신과 주변머리 때문일까. 여태까지 아내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제대로 챙겼던 적이 거의 없는 맹추이다. 그런 날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도 막상 당일이 되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거나 마(魔)가 껴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이런 푼수데기 같은 기질을 제대로 꿰뚫지 못한 아내는 나의 행동을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 정도로 치부하고 괘씸하게 여겨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었다. 그런 아내도 올 결혼기념일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가 화분을 보고 겨우 떠올렸단다. 그렇게 다시 기억했던 오늘이 그냥 자나가도 무덤덤한 아내에게도 세월은 비켜가지 않나보다.


벼슬길에 나가 승승장구 했거나 거대한 기업을 일궈 많은 부를 축적한 경우 때가 되면 주위에서 불나비처럼 떼를 지어 몰려들어 아첨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리라. 하지만 어느 모로 봐도 내세울 바가 없이 애옥살이를 겨우 면할 정도의 삶을 꾸렸던 이름 없는 사람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누군가가 챙겨줌은 진정한 축복이고 정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모습이 분명하리라. 이런 측면에서 내게 난 화분을 보낸 이를 다행스럽게 찾는다면 참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정중하게 사뢸 참이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영원히 찾지 못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 보낸 이유가 어디에 있던 그로 인해 달콤한 꿈을 꾸며 흐뭇한 마음에 실실거리며 살아갈 테니까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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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나태주님의 시는 ‘오래 보아야 예쁘다. 자세히 보아야 사랑스럽다’인데 분명히 리본에는 ‘오래 보아도 예쁘다. 자세히 보아도 사랑스럽다’로 잘못 표기되어 있었다. 왜 ⌜보아야⌟를 ⌜보아도⌟로 바뀌었을까 의심했었다. 그런데 배달 의뢰인의 존재가 밝혀지고 나서 원흉(?)인 L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결혼 후 47주년이 되도록 아내를 오랫동안 보고 또 봐도 예쁠 뿐 아니라 사랑스럽다’는 의미로 패러디하려고 일부러 ⌜야⌟를 ⌜도⌟로 바꿨다는 얘기였다.


* 11월 9일 20시 53분에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배달 의뢰인이 자수를 했다. 그 원흉(?)은 대학선배이자 대학원 동기인 친구로서 모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정년퇴임한 서울의 L박사였다. L박사가 보낸 문자 메시지 전문(全文)이다. ⌜11월 8일, 형수님의 결혼 47주년을 축하하며 ‘행복이 날아옴’이라는 꽃말의 ‘만천홍’을 골라 보았습니다. 아무쪼록 두 분 건강하시고 집안에 웃음꽃 만발하시기를 기도 합니다. 이승영 올림⌟


한올문학, 2023년 1월호(통권 157호), 2023년 1월 10일

(2022년 11월 8일 화요일)


댓글목록

김춘봉님의 댓글

김춘봉 작성일

교수님 글을 읽으면서, 수필 쓰는 방법을 터득해 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