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드림출판사

아내의 좌(座) - 김우현 > 명수필 추천 수필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고객센터
상담시간 : 오전 09:00 ~ 오후: 05:30
(주말 및 공휴일 휴무)
02.2612-5552
FAX:02.2688.5568

b3fd9ab59d168c7d4b7f2025f8741ecc_1583556614_6346.jpg 

아내의 좌(座) - 김우현

페이지 정보

작성자 no_profile 해드림출판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615회 작성일 19-11-26 13:42

본문

아내의 좌(座) - 김우현


자정이 넘은 집안은 고요하다. 아내는 엷은 땀기가 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잠들어 있고, 나는 그 곁에 깔린 요바닥에 배를 붙인 채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 가만히 들여다본다. 가슴께까지 덮인 엷은 이불이 주기적으로 가늘게 떨고 있다.

그 새 잔주름이 꽤 늘었다. 순하디 순하고, 조금은 심약하고 그리고 어디에 내어 놓아도 금시에 몽고족 후예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흔하디흔한 얼굴. 이 얼굴이 나와 함께 있은지가 어언 20년이 되었다.

나의 청년기를 쭈욱 지켜보며 살아온 한 친구가 당시의 나를 회상하면서 꼭 야생마 같았다고 한 적이 있다. 괴팍하고 고집 세고 곧잘 우쭐대고 하던 나를 지금에 와서 내가 돌이켜보아도 좀 무안하다. 남편감으로서는 분명히 하품이었다. 그런 나와 함께 20년을 탈 없이 걸어왔으니 참으로 용하다.

돈은 없고 벗은 찾아왔고, 그럴 때 부엌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아내에게 나는 어느 유족한 선비인 양 예사롭게 술상 보아오라 일렀었고, 아내는 행주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어깻죽지가 축 처진 모습을 하고 집 모퉁이를 돌아 동리의 구멍가게로 가는 것이었다. 미처 못다 갚은 외상값이 그대로 있는데 혀 굽은 소리를 거듭하고 소주병과 명태마리를 얻어 와서 상을 보아 올리던 아내.

나와 벗은 호탕하게 웃으며 술에 취해갔지만 아내는 설움을 달래며 부엌에 선채로 있었다. 결혼반지를 팔아 시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치르던 날 아내는 애써 쓸쓸히 웃었다. 저 어질디 어진 얼굴의 어느 구석에 그토록 질긴 인내력과 강인한 의지가 도사리고 있었음인지 암만 생각해 보아도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여인들이 겪는 아픔의 그 절반만큼이라도 잘 참고 견디어 낼 남정네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밖으로 약하면서 안으로 강인한 존재, 오직 인고로 얼룩진 하고한 나날을 묵묵히 감내하며 남편과 자식들을 순결한 사랑으로 고이 감싸며 있는 그 엄청난 저력이 놀랍다. 세상의 남정네들이 철없는 이기(利己)로 그들의 생을 점철할 때, 이것을 오히려 미소로 품어주는 한량없는 모성.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 이 아니라도 여기 잠들어 있는 저 심약한 여인이 나와 내 아들 딸의 그 많은 응석을, 그것도 20년을 하루같이 받아 주며 지순한 사랑으로 대해 왔으니 참으로 조화라 아니할 수 없다. 간혹 여권을 운위하는 거리의 여인을 본다. 우습다. 내 아내는 여권을 말하지 않지만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있어서 그녀는 거의 절대적 존재가 되어 있다.

밤이 깊었다. 사방이 고요하다. 나는 홀로 깨어 있어도 외롭지가 않다.


해드림 이승훈 출판과 문학 발행인 해드림출판사 대표 수필집[가족별곡](2012) [외삼촌의 편지] [국어사전에 있는 예쁜 낱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